하나님의 선택 (고전 1:18-31)

2012-07-03 화요일

교육 받고, 능력 있고, 돈 있고, 가문 좋은 사람과

교육 받지 못하고, 연약하고, 가난하고, 신분이 낮은 사람 중에 나라면 어떤 사람을 선택할까?

어떤 사람과 일을 하려고 할까?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이유가 그리스도와의 사귐을 위해서라고 했는데(9),

나라면 어떤 사람과 사귀고 싶을까?

쉽게 후자라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전자가 아닌 후자를 선택하셨다(26).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아마도 50명 남짓이었을 것이다(최고로 잡아도 80~100명 정도). 고린도 교회는 한 장소, 아마도 가이오의 집(16:23)에 모여서(11:20) 예배와 성만찬 식사를 했다. 그러니 한 집에 함께 모일 수 있는 정도의 사람들이라면 50~100명 정도였을 것이다. 그 중 교육 받은 자, 부유한 자, 가문 좋은 자가 전혀 없지는 않았다.

 

가이오(14;16:23), 회당장 그리스보(14;18:8), 회당장 소스데네(1;18:17), 스데바나(16;16:15), 글로에(11), 아굴라(18:2), 재무관 에라스도(16:23), 고린도 바로 옆 도시 겐드리아의 뵈뵈(16:1) - 8명 정도의 이름을 언급할 수 있을 것이다.

 

 가이오는 예배 처소를 제공할 정도의 집이 있었고, ‘글로에는 국제 교역을 할 수 있는 정도의 상인이었을 것이다(글로에는 여자다. 1:11의 글로에의 사람들은 지금 에베소에 있는 바울에게 소식을 전하고 있다. 일부러 소식을 전하러 간 것이 아니라면 글로에의 사람들은 상업 목적으로 에베소에 왔을 때 바울에게 대강의 소식을 전했을 수 있다). ‘뵈뵈는 바울이 고린도에서 쓴 로마서를 직접 가지고 로마로 갈 정도의 재력이 있는 여자였고, 교회의 패트로닌이었다. 상당한 영향력이 있는 여인이었다. 그 외 두 명의 회당장(그리스보소스데네)이 있었고 이들 또한 재정적으로 여유가 있던 자들이었다. ‘스데바나는 노예나 고용인을 거느릴 수 있는 규모의 부가 있었고, 아굴라는 지역을 오가며 사업을 수행할 정도의 사업장을 가지고 있었다. 로마서 16장에서 재무관으로 소개된 에라스도는 이후 고린도 시 전체의 재정 사용을 좌우했던 최고위 관리자 에라스도와 동일인이었을 것이다. (고린도에서 발견된 에라스도 인슈리프트 - ERASTVS PRO AED S.P. STRAVIT = “에라스도가 AEDILITAS가 된 것을 기념해 자기 돈으로 길을 포장하다“)

 

이들이 소위 뒤나또이‘(능력자.26)라 불릴 수 있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을 제외한 대다수 - 고린도 성도가 50명 정도였다면 40명 정도, 80명이었다면 70명 정도는 다양한 형태의 임금노동자, 노예, 해방 노예 출신이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자들을 선택하셨다(27.28). 그들에게 그리스도와의 사귐을 허락하셨고(9), 그리스도는 그들 가운데 거하며 그들의 지혜와 의와 거룩과 해방이 되셨다(31).

 

이런 사회적 지위의 차이들로 인해 고린도 교회는 이런 저런 문제들이 있었다.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는 문제도 단순히 신앙만의 문제가 아닌 재정적 차원의 문제이기도 했다. 아무나 아무 때나 고기를 사서 먹을 수 없지 않았겠는가? 시장에서 파는 고기를 사서 먹을 수 있는 사람들은 소위 뒤나또이‘(능력자.26)들 이었을 것이고, 그들은 누군가를 배려할 마음이 없었다.  또한 성찬 식사의 경우, 가난한 자들과 부유한 자들 사이에 문제가 있었다. 뒤나또이들은 배부르게 먹고 취하고, 가난한 이들은 손가락만 빨고 있었다. 고린도에서 문제를 일으켰던 유력자들이 누구였을지 모르나, 그들이 꼭 믿음에 부유한 자들이라 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 부유함과 능력과 지혜와 의로움은 세상적 차원의 소유에서 나오지 않는다. 참된 부유함은 예수와의 사귐에서 나온다. 예수와의 사귐이 깊어질수록 그 사람은 더욱더 부유한 참된 능력자(뒤나또이)가 된다. 가난한자, 천한자, 약한자를 향한 하나님의 선택은 참된 부유와 능력이 무엇인지를 보이기 위한 것이었을 것이다.

 

나는 뒤나또이인가? 예수와의 사귐! 그 안에서 진정한 의와 거룩과 지혜와 능력으로 충만한 자가 되어, 주안에서 자랑하는 삶을 살기를 꿈꾼다,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