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군의 여호와의 열심 (사9:1-7)

2012-8-18 토요일

"스블론과 납달리, 이방의 갈릴리, 흑암에 거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1-2)." 마태는 이 말씀이 예수를 통해 이루어졌다고 본다(마4:15-16). 그렇다면 8장 22절의 흑암과 9장 1절의 빛 사이에는 750년의 시간이 놓여 있는 것이다. 한편 생각하면 750년의 시간을 넘어 마침내 빛을 비추신 하나님의 은혜가 크지만, 다른 한편 생각하면 이스라엘은 750년 간을 무거운 멍에와 채찍, 압제자의 막대기 아래 신음했던 것이다(4). 그 오랜세월 무겁게 맨 멍에 아래 신음했던 자들을 풀어 해방하신 분은 만군의 여호와(7), 전능하신 하나님이다(6). 만군의 여호와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면 좀더 일찍 이 일을 행하실 순 없으셨을까? 그런 답답함을 가지고 하나님을 바라보면, 하나님은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으로 이를 이룰 것"이라고 대답하신다. 그 대답 '소리'를 들을 때 나의 마음의 답답함은 하나님의 마음 안으로 옮겨진다. 갈릴리 바닷가를 걷던 그분의 손과 발, 목소리에 담긴 사랑... 그 열심을 보고, 마침내 꺽여진 멍에가 원망이 아닌 감사의 제목임을 알게 된다. 늦게 온 것이 아니라, 영원히 온 것이다(6).

-----------------------------------------

그리하여도 Vs 그럴지라도 (사9:8-21) 

2012-8-19 주일

아람 왕 르신의 꼬봉노릇을 하면서 이스라엘은 아람의 착취와 블레셋의 위협 속에서 곤고해져 갔다(12). 겉으로는 동반자이나 속으로는 착취자인 아람 세력으로 인해 이스라엘 내부는 서로 분열되어 갔고(21), 서로 물고 뜯는 가운데 지도와자 선지자들은 타락해갔다(15). 그 결과는 고아와 과부의 피폐한 삶이었다(17). 의지했던 아람의 시꺼먼 속내에 허걱 놀라고, 생각지도 않았던 블레셋의 공격에 어쩔 줄 모를 때(12), 이스라엘은 그 속에서 하나님의 징계를 알아 차려야 했다(9). 그러나 그들의 '교만'이, 무릎 꿇음 대신 헛된 자존심을 앞세우게 했으니, 뽕나무들이 찍혔다면 백향목으로 갈아치우면 된다는 허장성세로 자신을 가리는 것이었다(10). '그럴지라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징계하는 일을 중단하지 않았다(12). 하나님의 징계가 이스라엘 곳곳에 이르렀다.  '그리하여도' 이 백성은 자기를 치시는 이에게 돌아오지 않았고, 여호와를 찾지 않았다(13).  '그럴지라도' 하나님의 진노는 돌아서지 않았다(17). 서로가 서로 물고 뜯는 끔찍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지만, '그리하여도' 그들은 여호와를 찾지 않았다(20). '그럴지라도' 여호와의 진노의 손은 여전히 그들 위에 펴져 있었다(21). '그리하여도' 돌이키지 못하는 백성과 '그럴지라도' 그들을 치시는 하나님...  징계하고자  여전히 펴고 계신 손(12,17,21), 그 아비의 손을 잡고, 이제는 그의 품에 안겨도 좋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