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복음 (고전 15:1-11)

2012년 7월 29일 주일

500여 명의 부활의 증인들이 전했던 복음은 '같은 복음'이었다(11). 이방인의 사도 바울도, 할례자들의 사도 베드로도(갈2:8), 예루살렘의 지도자 야고보도 같은 복음을 전했다.  복음은 바울이 만들었거나, 바울 이후에야(32/33년) 비로서 정식화 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교회의 것이었다. 교회가 복음을 만든 것이 아니라, 복음이 교회를 만들고 세웠다. 
 
동일한 복음 위에 30년 경 예루살렘에 교회가 섰고, 같은 복음 위에 50-52년 고린도에 교회가 섰다. 25년의 시간, 500여 명의 다양한 부활의 증인들, 이방인과 유대인의 차이, 바울과 야고보 사이의 강조점의 차이, 교회들의 상황과 처지의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복음은 오직 하나다. 모든 시대, 모든 인간을 위한, 오직 하나의 복음이 있을 뿐이다.    "메시야가 우리 죄를 위해 죽고, 우리 의를 위해 다시 사셨다(3-4; cf. 롬4:25)" 
 
시대와 역사와 상황에 속한 모든 차이를 뛰어 넘어,  모든 교회가 그 위에 서 있는 단 하나의 반석 - 복음. 
"메시야 예수가 죄인인 우리를 위해 죽으셨고, 다시 살아 나셨다!"

--------------------------------------

부활 - 기만인가 현실인가 (고전 15:12-19)

2012년 7월 30일 월요일

부활이 없다면 "여러분은 여전히 여러분의 죄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17)  믿음은 심리적 만족과 위안이 아닌, 현실이다. 예수 부활이 역사 안에서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면, 죄에서의 해방 또한 '신자'의 삶 속에서 실제로 일어날리가 없다. 그러나 죄의 지배가 실제로 종결되고, 신자의 삶 속에 '씻음과 거룩과 의'가 실제로 체험된다면(6:11), 그것은 예수의 부활이 환상이 아닌 실제 사건이기 때문이다.

 

예수가 다시 사신 것이, 공교히 만든 거짓 이야기일 뿐이라면, 기독교는 아무 능력도 나타낼 수 없는 헛껍데기에 불과하다.

그러나 예수가 다시 사신 것이 실제 사건이라면, 신자는 예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지금 바로 여기에서, 생명과 의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예수의 부활 여부는 그러니 믿음 안에서 사는 신자의 삶 그 자체가 답이다. 죄로부터의 해방과 의를 향한 열매 맺음이 없으면서, 부활을 주장하다면 그것은 기만이다. 그러나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의 열매가 실제로 맺혀지고 있다면, 부활은 매일 경험되는 현실이다.

----------------------------------------

인간조건 (고전 15:20-34)

2012년 7월 31일 화요일

하나님은 창조주다. 그러니 그가 만물의 주인이다. 

세상을 창조함에 있어 어떠한 일도 한 적 없는, 따라서 아무 권리도 없는 사람이, 만물의 주인이 되겠다고 나섰다.

자격도 권리도 능력도 없는 자가 다스리는 세상은 끔찍한 세상이다. 죽음이 세상을 관통했다.

생명으로 피었다가, 죽음으로 지고마는 운명이, 만물의 숙명이 되었다. 죽음이 인간 조건이 되었다.

인간은 만물의 주인이 아니다. 주인 노릇할 생각도 없고, 애정도 없다. 그가 만든 세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만물의 주인이다(28). 만물의 주인됨을 포기할 생각이 없다(25). 그에겐 애정이 있다(요3:16). 그가 만든 세상이기 때문이다.

예수의 부활은 하나님의 주권 회복의 첫 열매다(20). 죽음이 인간 조건인 세상 한 가운데, 영생이 인간 조건인 세상이 열려 펼쳐졌다(20).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23), 그들에게 삶은 이전과는 다른 것이 되었다.

죽음이 인간조건일 때, 사람은 어떻게든 죽지 않고자 하지만, 영생이 인간조건일 때 사람은 기꺼이 죽을수 있다.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을 때', 사람에겐 죽음이 아닌 영생이 자란다.

"내가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속지 말라.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