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언과 예언 (고전 14:1-25)

2012년 7월 27일 금요일

방언도 말이고, 예언도  말이다. 하지만 말이라고 다 같은 말이 아니다. 혼잣말도 있고, 대화도 있고, 설득도 있고, 선포도 있다. 하소연도 있고, 설명도 있고, 주장도 있고, 가르침도 있다.

 

방언은 혼잣말이다. 그의 영이 하나님께 고하는 영의 혼잣말이니, 통역이 없다면, 말하는 본인의 마음 조차 모르는 혼잣말이다(14). 우리가 하는 대부분의 말 또한 혼잣말인 경우가 많다. 술자리의 대화는 대부분 대화가 아닌 혼잣말이다. 혼잣말로라도 마음을 풀어 놓을 수 있다면, 그로 인해 누군가의 말을 담을 마음의 여유가 생긴다면, 그 또한 의미 있는 말일 것이다.

 

예언은 그의 마음 조차 모르고 있던, 아니 알고 있기에 묻어두고자 했던, 자신의 모습을, 그에게 보여주는 말이다(25). 푸닥거리로 마음이 치유되기도 하는 것은 굿판을 벌이는 자가 병든 자의 마음의 말을 대신 내 뱉어 주기 때문이다.  혼잣말도 제대로 못하고 살아, 마음에 병이 든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책망과 판단, 감추인 것을 드러내는 예언(24-25)의 말은 마음에 맺혔던 말을 풀어내어,  그로 하나님께 '말하게' 한다(25).

 

일만 마디 방언보다, 깨달은 마음으로, 마음에 말하는 ,다섯 마디 말 - 그런 '말'을 하며 살고 싶다.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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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고전 14:26-40)

2012년 7월 28일 토요일

고린도 교회의 예배는, 형식이 아예 없지는 않았지만, 형식에 구애 받지도 않았다. 자유로웠다고 말하기엔 사실상 정신이 없었다. 교회로 모일 때, 그들 가운데 찬송도, 가르침도, 계시도, 방언도, 해석도 있었다(26). 덕분에 문제도 있었다.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말을 하기도 했고(cf. 31),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으로만 말하는 이도 있었고(cf.28), 한번 말하기 시작하면 그칠 줄을 몰랐다(cf.30,32). 여인들에게 은사가 더욱 많았던 듯하다(cf.34-35). 예언의 영에 사로잡히거나, 방언이 시작되면 그것을 콘트롤하지 못했다. 성령이 말하니 누구도 그것을 금할 수 없다 여겼다.

하지만 바울은 예언의 영이 예언하는 자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말한다(32). 말하는 자가 말을 할 수도, 말을 하지 않을 수도 있어야 말이다. 말 함을 통제할 수 없다면, 아예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누군가가 말할 때, 듣기 위하여 말을 멈출 수 없다면, 아예 잠잠해야 한다(28,30,34). 잠잠할 수 있어야 배울 수 있고, 배울 수 있어야 가르칠 수 있다. 잠잠할 수 없다면 배울 수 없고, 배울 수 없다면 가르칠 수도 없다(cf. 3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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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많이 한다고, 말을 하는 것이 아니며, 잠잠하다고 말을 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차례(27), 순서(31), 질서(33,40)를 따라 품위(40)있게 말할 수 없다면, 서로를 일으켜 세워(26), 성도 간에 평화(33)를 만드는 말이 아니라면, 잠잠함으로 배우는 것이 낫다(35).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입을 막고자 하는가? 그렇지 않다.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아야"(39)한다. 다만, 말하는 자는 먼저 '잠잠함'과 '들음'부터 배워야 한다. 그래야 "품위 있고, 질서 있게"(40) 말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