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와 여자, 수치와 영광 (고전 11:2-16)

2012년 7월 21일 토요일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 없고, 여자 없이 남자 없습니다."(11) "왜냐하면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 같이 남자 또한 여자로 말미암아 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났습니다"(12).  앞서 남여의 위계나 차별이 아닌, 남녀의 질서와 구별을 말하던 바울은, 그러나 이곳에서 보다 근본적인 일반 원리(캐논)를 천명한다. 이것은 그가 갈라디아서에서 밝힌 캐논(cf. 갈6:16)  -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3:28) - 의 일부이다.

 

예배 중 여성이 머리를 무엇으로 덮는 문제에 대한 본문은 그 해석이 어렵기로 유명하다. 머리를 기르고 자르고, 길게하고 짧게하고, 풀고 묶고, 쓰고 쓰지 않고 등등의 규례가 시대와 지역과 문화에 따라 그 의미가 얽히고 섥힌 양상을 보이기 때문이다 (유대인 남자는 하나님의 권위 아래 있다는 표로 머리에 모자를 써야 한다 등등... ).  비록 바울이 우리나 하나님의 교회나 이런 '관습'이 없다(16)고 했지만, 어떻든 이는 캐논이 아닌 '관습, 쉬네테이아'이다(8:7). 물론 바울은 여성의 머리를 무엇으로 덮는 문제를 창2장을 동원하여 뒷받침하고자 하지만(8-9), 그러나 11-12절에서 "주 안에서" 지배되는 근본원리를 밝힘으로 그 내용을 제한 한다.

 

본문을 지배하는 중요 단어는 남자와 여자 뿐 아니라, 수치(4,5,6,14)와 영광(7,15)이다.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고,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다(7). 남자는 하나님의 영광으로 살아야 하고, 여자는 남자의 영광으로 살아야 한다. 남자는 하나님의 얼굴이고, 여자는 남자의 얼굴이다. 사회적으로 인정되고 유행하는 관습을 따르거나 거부하는 기준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그것이 수치와 부끄러움이 되는가? 아니면 영광과 존귀함이 되는가? 하는 것이다. 관습과 규례에 선행하는 기준(캐논) - 갈3:28, 고전 11:11-12 - 에 따라 하나님과 사람의 영광과 존귀를 구함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남,녀 모두의 삶을 지배하는 관례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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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찬과 새로운 질서 (고전 11:17-34)

2012년 7월 22일 주일

고린도 교회의 성찬 식사는 자기가 가져온 음식을 자기가 먹는 형태였다(21). 대부분이 가난한 자였으니, 노동이 끝나고 늦게 오는 자들도 있었고(33), 자기 먹을 음식 조차 가져오지 못하는 자들도 있었다(22). 부유한 자들과 지위가 있는 자들은 배불리 먹고 마셨고, 가난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른 빵조차 먹기 힘들었다. 손가락만 빨고 있었다(21). 한 공간에서(18a. 20a) 부자와 가난한자, 남자와 여자, 권세 있는 자와 없는 자, 주인과 종이 함께 먹었다. 그것이 복음이 가져다 준 새로운 질서였다. 하지만 한 공간에서 먹는다는 상징성만 혁명적일 뿐, 실상은 자신들이 가져온 것으로 자신들이 먹었으니, 각자 자기 집에서 먹는 것과 별 차이가 없는 것이었다. 사실상 이전의 세상 질서가 여전히 지속되고 있었다. 부자는 배불리 먹고 취했고, 가난한 자는 여전히 배가 고팠다(21).

성찬은 예수께서 자기 몸과 피를 '우리를 위해 내어 주신' 식사를 기념하는 것이다(24). 그런 성찬에 참여하는 자들이 서로을 위해 자기 살을 내어주기는 커녕, 자기가 가져온 여유 있는 음식조차 함께 나눌 수 없다면, 그것은 더이상 성찬이 아이다. 일주일을 기다렸을 예배-식사에 빵 한 조각 조차 가져올 수 없었던 자들을 옆에 두고도, 자기만을 배불리고 있다면, 그것은 더이상 성찬이 아니다. 이런 성찬 아닌 성찬을 행하는 교회가 꼭 고린도 교회만은 아닐 것이다.

이런 형태의 식사 장면은 상상하기 힘들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한쪽에서는 살을 빼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하고, 한쪽에서는 1분에 24명, 하루에 3만 5천명이 굶어 죽어가는 지구촌을 생각한다면, 있을 수 없는 일만도 아니다. 성찬의 떡은 그저 '먹는 것'이 아니라, '떼어 나누는 것'이다(24). 그 떼어 나눔 안에서 새로운 질서가 발생한다. 자기 것을 떼어 나눌 때에만, 오직 그 때에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