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하 1 - 이런 마음이 네게 있으니 (대하1:1-17)

 

사람의 마음에 하나님이 기뻐할 만한 생각이 품어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마음에 부나 재물이나 자기의 명예나 원수 갚음이나 자기의 건강에 대한 생각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위한 마음이 품어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11).

 

왕이 되어 다른 어떤 것을 시행하기 전에 하나님께 예배할 마음이 생긴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3,6). 하나님을 예배하되, 역사 속에 일해 오신 하나님과 단절하고 자신의 통치를 위한 이데올로기로서 종교를 사용하고자 하지 않고 이스라엘의 하나님 예배의 첫 시작이랄 수 있는 모세의 회막과 브살렐의 놋 제단이 있는 기브온에 가서 하나님을 예배하고자 할 마음이 생긴다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다(3,5).  

 

그런 마음이 있는 솔로몬을 하나님은 복 주신다. 아니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음이 복이다. 그런 마음이 없는 자에게 주어지는 부귀 영화는 복일 수 없다. 솔로몬에게 주어진 소위 부귀 영화는 그의 마음에 담겨진 생각이 복된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증거이지, 그것 자체가 복은 아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자 하는 마음,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사역을 다하기 위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마음(9,11), 자기의 복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복을 구하는 마음, 그 마음을 가진 자를 하나님은 기뻐하신다. 이 복과 은혜가 나와 교회 모든 식구들 가운데 주어지고 누려지기를!

-----------------

cf. 일천 번제 - 솔로몬이 드렸다는 '일천 번제'는 '1천번의 번제'라기 보다는 '1천 마리의 번제'라 보는 것이 타당해보이다.

원문은 대하 1:6과 왕상 3:4 모두에서 '번제 1천'을 드렸다이다. (왕상 3:4은 '번제 1천을 드렸다'에서 드렸다는 동사가 미완료 동사이다. 때문에 ESV는 이를 '번제 1천을 드리곤 했다'고 옮긴다. 그렇게 옮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ELB나 LUT 같은 경우 이를 단순과거로 하여 '번제 1천을 드렸다'고 옮긴다.)

 

'1천 번의 번제'로 옮기면 솔로몬이 아침 저녁으로 매일 드리는 상번제를 드렸다고 봐도 1년 4개월 정도에 걸쳐 번제를 드렸다는 것이 될 수 있는데, 역대기의 문맥은 이런 이해를 허용하지 않는다. 역대기 문맥은 솔로몬이 모든 지도자들과 더불어 기브온에 가서 그 곳에서 '번제 1천' 곧 1천 마리의 희생 제물로 번제를 드렸고, 그 때에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나타났다고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다만 열왕기상 3장의 문맥은 이와 달라 ESV의 번역처럼 솔로몬이 몇 차례에 걸쳐 1천 마리의 희생제물로 번제를 드렸다고 읽을 가능성도 열어 놓는다. 그러나 이것이 '1천 번의 번제' 곧 '1천 번의 치성'을 드리는 형태의 번제로 이해될 수는 없다.

 

대상 29:21에서 다윗은 수송아지 천마리, 숫양 천 마리, 어린양 첫 마리로 번제를 드린다. 그리고 왕상 8:63에서 솔로몬은 성전을 봉헌 할 때 소 이만 이천 마리, 양 십이만 마리로 화목제사를 드린다(대하 7:5). 따라서 천 마리의 제물로 드리는 번제는 솔로몬에게 그리 낯선 경험이 아니다. 

 

솔로몬이 드린 1천 번제는 그러니 1천 번의 치성을 보인 제사가 아니라, 1천이라는 완전수를 통해 상징되는 바 자신의 전부를 하나님께 드린다는 고백의 제사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온전히 태워 드리는 '번제'가 의미하는 바라 할 수 있다. 사무엘은 1천 마리가 아닌 양 1마리로 온전한 번제를 여호와께 드리고 여호와는 그의 기도에 응답하신다(삼상 7:9).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온전한 번제'는(시 51:19)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 곧 자기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에 맡기는 자의 마음이다(51:17). 하나님은 솔로몬에게서도 그 마음을 만났으리라~!(대하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