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3새 언약의 일꾼 (고후3:1-18)

 

인사말(1:1-2) – 환란 중의 위로(1:3-11) – 고린도 방문 연기의 이유(1:12-24) – 눈물의 편지(2:1-11) – 디도를 기다리다 드로아에서 마케도니아까지 옴 (2:12-13). 이렇게 나름 따라갈 수 있는 논리적 전개를 따라 이어지던 편지가 2:14절부터 갑자기 튀기 시작한다. 사실 편지는 213(디도를 만나지 못하여 심령이 편치 않아 마케도냐로 갔노라)에서 75(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 환란과 어려움이 있었지만, 낙심한 자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가 옴으로 우리를 위로했다)로 이어져야 한다.

 

2:14-7:4 까지의 내용은 어찌 보면 갑작스럽고 뜬금없어 보인다. 그러나 바울이 이렇게 편지를 썼을 때에는 이유가 있다. 2:14-7:4까지의 내용은 마케도니아에서 디도를 기다리며 바울 자신이 스스로의 사역을 다시 돌아보고, 고린도 성도들을 향해 자신이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스스로 정리한 내용으로 보인다. 정죄가 아닌 의를 이루는 새 언약의 일꾼으로서(3:6,9) 바울은 자기에게 주어진 권위를 따라 그들을 넘어뜨리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세우고자 한다(13:10).

 

두 번째 고린도 방문 이후 바울은 곧 바로 고린도로 돌아가지 않고 최소 6개월 정도의 시간을 두고 그들을 기다린다. 스스로 고통(뤼페)’이라 표현했던 그 시간 동안 바울은 복음의 사도로서 자기 정체성을 다시 확인하고 점검하였을 것이다. 3-6장의 내용들은 그리하여 정죄가 아닌 의를 이루는 새 언약의 일꾼인 자신’(3), 성도들 안에 생명이 역사하도록 죽음에 넘겨지는 사도된 자신 (4), 세상과의 화목을 위해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받은 자신(5), 하나님의 일꾼 된 자로서 고린도 성도들을 향하는 자신의 마음(6)을 일관되게 표현하고 있다.

 

바울은 정죄와 죽음을 이루는 율법의 일꾼이 아니라(3:6,9) 의와 생명을 주는 새 언약의 일꾼이다(3:6,9). 정죄와 죽음을 이루는 율법 또한 영광스러운 직분이었지만, 그 영광은 결국 사라질 한시적인 것이었다(3:7,10-11). 그에 반해 의와 생명과 자유를 주는 새언약의 직분은 사라지지 않는 영광을 가진다(3:11).

 

비록 지금 새 언약의 일꾼 바울에 의해 쓰여진 편지인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3:2) 어찌 보면 그리 영광스러워 보이지 않는다. 새 언약의 일꾼인 바울 또한 모세에 비하여 전혀 영광스러워 보이지 않는다(3:5). 그러나 죽이는 문자가 아니라 살리는 하나님의 영에 의해 그 직분을 수행하고 있는 바울은 마침내 주님과 같이 영광스럽게 변화 될 것이다(3:18). 이는 바울뿐 아니라, 바울에 의해 쓰여진 편지인 고린도 성도들 또한 마찬가지다.

 

비록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지금 연약함 가운데 있지만 그러나 그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이 직접 쓰신 그리스도의 편지다(3). 율법의 문자들은 그 자체 영광스러울지 몰라도 그것을 행하지 않는 자들을 다만 정죄할 뿐이다. 그러나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은 고단한 일상을 살고 있는 오늘 내 삶 속에 오셔서 주의 영광을 내 마음 판에 써갈 것이고, 마침내 나를 그의 영광에 이르도록 인도할 것이다(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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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후 3장 - 영광? (고후 3:1-18)

 

살면서 그럴듯해 보이고 빛나 보이는 것이 복음의 빛은 아니다. 소위 성공과 높은 지위가 복음의 빛은 아니다. 십자가라는 빛이랄 수 없는 짐을 감당했던 예수가 그로 인해 나의 삶을 ‘사랑의 편지’로 만들었듯, 복음 또한 그 자신 빛이랄 수 없는 오늘을 감당하는 자들의 삶을 통해 누군가의 삶을 ‘사랑의 편지’로 쓰는 빛이다(2).

예수는 사람이 되셨고, 마구간에 오셨고, 목수로 사셨다. 그 삶은 할 수만 있으면 피해야 할 하찮은 삶이 아닌, 하나님 자신이 살았던 삶이었다. 그 자신 텐트 메이커로 살면서 땀 흘리고 노동했던 바울, 그 모든 수고를 가지고 고린도 교회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섬기고자 했던 바울, 그의 노동과 섬김이 써낸 편지인 고린도 교회 성도들, 그 영광의 빛이 눈부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