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고후 2장 – 고통의 오늘 (고후2:1-17)
‘근심’이란 말이 짧은 문단(2:1-11)에 8번(명사형 3번, 동사형 5번) 나타난다. 우리 성경이 ‘근심’이라 번역한 헬라어 ‘뤼페’는 ‘고통, 슬픔, 아픔’ 등을 뜻하는 말로, 성경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을 나타낸다. 하와는 ‘고통’ 중에 아이를 낳고, 아담은 ‘고통’ 중에 일하여 먹을 것을 먹는다(창3:16-17). 노아는 ‘고통’ 중에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위로가 될 것이다(창5:29). 스승 예수를 잃고 제자들은 ‘고통’스러워 하겠지만, 그 ‘고통’은 ‘기쁨’이 될 것이다(요16:20)
사람 사는 세상에 ‘고통’이 없을 수 없다. 그것은 모든 ‘아담적’ 인간의 몫이다. 예수를 믿고 구원 받았다 해도 ‘사람’으로서 이 땅을 살아가는 이상, 고통과 슬픔과 근심이 없을 수 없다. 바울과 고린도 교회 또한 고통스러운 일을 겪고, 아파하고, 근심한다(1,2,3,4,5,7). 예수 믿고 사는 삶이라고 햇살 가득한 꽃밭만은 아니다. 그러나 사람의 삶엔 고통과 근심이 있는 만큼이나 기쁨도(2,3) 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서의 일들로 고통을 겪었다. 그런데 이제 다시는 고통 중에 그들에게 가지 않기로 결심을 한다(1). 바울이 원하는 것은 고통의 확산이 아니라 그들과 자신의 기쁨이다(3). 그러나 이러한 기쁨은 ‘허허거리며’ 웃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바울은 ‘많은 고통과 눈물로’ 편지를 썼고(4), 고린도 성도들은 그 편지로 인해 ‘고통’을 겪었다(7:8). 하지만 그로 말미암아 그들은 ‘구원에 이르는 회개’에 이르게 되었고(7:9), 그 결국은 바울과 성도들 모두의 ‘기쁨’이었다(7:7).
‘많은 고통과 눈물’ 가운데서(4) 기쁨을 만드는 길은 그러니 그냥 ‘어쩌다 마주치게 된 우연’이 아닌 ‘사랑’이었다(4). 마음이 곤하여지지 않고, 몸이 곤하여지지 않으면서도 할 수 있는 사랑은 세상에 없다. 제자들의 ‘고통’이 ‘기쁨’으로 바뀔 수 있었던 것은 십자가를 지셨던 예수의 ‘사랑’ 때문이었다(요16:22). 고통으로 마음이 상했을 성도들을 향해, 바울은 자신이 그들을 ‘사랑’했듯, 그들 또한 서로에 대한 ‘사랑’을 나타내라고 권한다(8). 그 사랑이 나타나는 방식은 지금은 ‘용서’이다(7,10).
사람으로서 산다는 것은 어쩌면 고통을 짊어지고 살아간다 것이다. 고통 중에 태어나고, 고통 중에 일하며 평생을 산다. 그러나 고통의 오늘이 반드시 ‘멸망’(15)과 ‘사망’(7:10)으로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누군가의 몫의 고통을 짊어지는 ’사랑’으로 말미암아 오늘 우리는 ‘기쁨’을 누릴 수 있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오늘 우리는 ‘승리의 개선 행진’을(14) 할 수 있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기 자신을 내어주신’ 그리스도를 모시고 사는 자들은 ‘고통’의 오늘 속에서도 ‘사망’이 아닌 ‘생명’의 냄새가 난다(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