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21장 - 욥의 경건 (욥 21:1-34)


“악한 자는 반드시 망한다. 악한 자의 자랑은 잠깐 뿐이다. 그 행복이 오래가지 않는다. 그의 자식 때에라도 갚으실 것이다. 악한 자의 자식이 잘 되는 법이 없다“ – 소발과 친구들이 한 목소리로 말한다. 이에 대해 욥은 그들의 말은 다만 도덕적 요청일 뿐 현실에 대한 거짓 설명이라고 말한다(34).


욥이 묻는다. “악한 자들의 등불이 꺼진 일이 있느냐? 과연 그들에게 재앙이 닥친 일이 있느냐? 하나님이 진노하시어, 그들을 고통에 빠지게 하신 적이 있느냐? 그들이 바람에 날리는 검불과 같이 된 적이 있느냐? 폭풍에 날리는 겨와 같이 된 적이 있느냐?“(17-18)


욥이 답한다. “너희의 말이 ‘세도 부리던 자의 집이 어디에 있으며, 악한 자가 살던 집이 어디에 있느냐?‘ 한다. 너희는 세상을 많이 돌아다닌 견문 넓은 사람들과 말을 해 본 일이 없느냐? 너희는 그 여행자들이 하는 말을 알지 못하느냐? 그들이 하는 말을 들어 보아라. 하나님이 진노하셔서 재앙을 내리셔도, 항상 살아 남는 사람은 악한 자라고 한다(28-30)


욥의 친구들은 말할 것이다. 악인이 번성하는 듯 보여도 그것은 잠깐이며, 하나님은 악인의 죄악을 그 아들에게라도 갚을 것이라고(19). 그러나 욥이 말한다. 죄를 지은 당사자가 벌을 받고, 당사자가 망해야 한다고(19). 그러나 현실은 악인은 죽을 때도 편히 죽고 죽어서도 좋은 곳에 묻히며 조문하는 행렬로 넘쳐난다고(13,32,33).


그렇다면 욥은 악하게 살든 선하게 살든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것인가? 욥은 악인의 삶을 오히려 찬양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현실은 비록 악하게 사는 자들이 번성하고, 마지막까지 재앙 속에서도 살아 남지만, 그러나 자신은 결코 그들의 계획과 뜻을 따라 살 생각이 없으며, 그들의 계획은 자기 마음에 머물 곳이 없다고 한다(16). 악인들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은 채 자신들의 성공이 자기 힘으로 이룬 것이라 생각하지만(15,16) 그러나 욥은 그 또한 하나님의 손에서 나온 것이라 여긴다.


어찌하여 하나님이 악인을 심판하지 않는지, 어찌하여 하나님이 악인에게 행복한 삶을 허락하시는지(13), 어찌하여 죽을 때까지 걱정 없이 살도록 해 주시는지(13) 알 수가 없지만, 그러나 욥 자신 그 길을 부러워하지도 않으며, 그 길을 따라 가려 하지도 않는다.


어떤 사람은 평생 안전하고 평안히 살고(23,24), 어떤 사람은 고통과 괴로움 속에서 평생을 산다(25). 그러나 둘 다 죽어 흙에 묻힌다(26). 사람의 삶의 행과 불행이 선과 악에 일치하지 않는다. 오히려 악한 이들이 더 넉넉하게 살다가, 넉넉하게 죽는다.


그렇다 하더라도, 욥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경건을 멸시하는 악한 자들의 생각을 자기 마음에 들여 놓을 생각이 없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주의 도리를 알기를 바라며 그를 섬기고 그에게 기도하는 것을 중단할 생각이 없다(14,15). 이쯤 되면 욥의 경건은 '까닭 없는' 경건이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로 경건인가? 욥은 하나님이 아닌 도덕 원리를 섬기는 것은 아닌가? 현실이 어떠하든 자신은 올바른 것을 선택하고 살겠다는 신념이 아닌가? 아니다. 욥은 도덕 원리가 삶의 모든 것을 다 설명해 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누구는 평생 평안을 누리고, 누구는 평생 고통을 겪으나 그 여부는 선과 악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분명 삶은 그의 앞에 놓여 있는데, 도덕 원리는 그 전부를 담아내기에는 넉넉한 그릇이 아니다.


하나님은 어찌하여 악인을 놓아 두는지, 하나님은 어찌하여 악인이 죽을 때까지도 평안하게 눈 감게 하는지, 하나님은 어찌하여 자신을 거부하는 불경건한 자를 그로 인해 멸하지 않는지 욥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금 그렇게 행하신다. 그러니 욥은 그분 하나님을 만나보고 싶은 것이다. 그 뒤에 뭐가 놓여 있는지. 그 뒤에 또 다른 권선징악의 법이 놓여 있는지, 겨우 그 뿐이라면 어찌하여 지금은 그것을 내버려 두시는지 욥은 하나님 자신을 만나고 싶은 것이다.


헛된 위로의 말 뒤로 숨지 않고, 도덕적 당위라는 명분을 현실에 덮어 씌우지 않으며(34), 이해할 수 없으나 매일 같이 주어지는 오늘, 살아계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며 그 앞에서 살아가는 것, 욥의 경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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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욥기 21장의 경우, 개역성경 번역은 욥의 말의 논리를 잘 따라가지 못하고 휘청댄다. 물론 본문을 의문문으로 처리할지, 평서문으로 처리할지는 쉬운 결정이 아니다. 하지만 욥21:16-22; 30-33의 경우, 개역 성경의 번역은 앞서 옮겨 놓은 욥의 말과 모순될뿐 아니라, 욥은 결국 소발 등 친구들의 논리를 반복하고 만다. 새번역이나 우리말 번역 카톨릭 번역 등은 해당 본문을 욥이 친구들의 논리를 부정하는 말로 옮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