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21장 - 무죄한 피 흘림 (신21:1-23)

누구에게 죽임을 당한지 모르는 시체가 발견되었을 경우 사건은 그저 미제로 남는 것으로 족한 것이 아니다(1). 누군가의 억울한 죽음은 그에 합당한 처벌을 통해 그 죄값이 치러져야 한다. 그러나 사건이 미제로 남는 경우 그 값을 치를 사람이 없다. 그 때 시체가 발견된 곳에서 제일 가까운 마을 장로들이 송아지를 잡아 그 피를 흐르는 물에 뿌리는 것으로 무죄한 피를 흘린 죄를 속해야 한다(4,7,8).

죽을 죄를 범한 사람은 사형을 당하고 때로 나무에 달린다(22). 그러나 그 시체는 그날 나무에서 내려져 장사 지내져야 한다.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자이기 때문이다(23)....

예수의 경우 무죄한 피가 흘려졌는데, 무죄한 피를 흘린 사람이 아닌 예수 자신이 나무에 달렸다. 무수한 사람들에 의해 무죄한 피가 흘려졌는데, 그런데 무죄한 피를 흘린 무수한 무리가 아닌 예수 자신이 오히려 나무에 달렸다. 이 모순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무죄한 피 흘림은 그를 속하기 위해 멍에를 메지 않은 암송아지를 취해 그 피를 흘리는 것으로 속해진다. 예수의 경우 무죄한 피 흘림의 당사자 자신이 무수한 무리들에 의해 자행된 범죄를 속하기 위해 그 자신 저주 받아 마땅한 자의 모습으로 나무에 달려 그 피를 흘림으로 무수한 무리들의 죄를 속했다(갈3:13).

무죄한 피 흘림의 경우 장로들은 “우리의 손이 이 피를 흘리지 아니하였고 우리의 눈이 이것을 보지도 못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우리를 사하소서“(7-8)라고 말하며 그 손을 씻는 것으로 무죄한 피가 흘려진 죄에서 용서함을 받았다(6).

예수의 피 흘림에 참여했던 자들은 그와 반대로 “우리의 손이 이 피를 흘렸고, 우리의 눈이 이것을 보았습니다. 무죄한 피를 흘린 우리가 아닌, 무죄한 예수가 우리의 죄를 속하기 위해 나무에 달렸습니다. 그러니 여호와여 우리를 용서하소서“라고 말하는 것으로 그 죄의 용서를 받는다(cf.사53장; 행2:36,38).

어떤 부모에게 반역하고 거스리며 방탕에 잠긴 아들이 있을 때 그 부모가 성문 앞 장로들 앞으로 그 자녀를 이끌어 오면 심판을 받고 돌로 쳐 죽임을 당하게 된다(18-21). 그러나 그 아들이 아무리 패역하고 완악한들 어떤 부모가 자기 아들을 사람들 앞으로 끌어 내어 돌로 쳐 죽임을 당하게 할 수 있겠는가? 어리석고 패역하여 부모의 말을 거스리고 방탕과 술에 잠기는 자녀는 있을 수 있어도(20), 죽어 마땅한 자녀일지라도 그를 사람들 앞으로 이끌어 죽게 할 부모는 없을 것이다(호11:1-9).

무죄한 피를 흘린 무수한 무리들이 아닌 그들에 의해 무죄한 피를 흘린 예수 자신이 나무에 달려 그들의 저주를 짊어진 것은, 자녀의 패역함과 방탕함으로 인해 마음이 타는 부모가 그럼에도 그 자녀를 죽음의 자리로 이끌 수 없는 것과 같이, 자신의 형상으로 지으신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된 ‘모순‘일 것이다.

그 사랑을 흉내라도 내는 자리에 내가 있는가? 아니다. 나는 다만 “나의 손이 이 피를 흘렸고, 나의 눈이 이것을 보았습니다. 무죄한 피를 흘린 내가 아닌, 무죄한 예수가 나의 죄를 속하기 위해 나무에 달렸습니다. 그러니 여호와여 나를 용서하소서“라고 말하는 자리에 있을 뿐이다. 이 고백 속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을 나의 마음이 참으로 느낄 수 있다면, 그 때 나는 감히 그 사랑을 흉내라도 낼 수 있는 자리에 있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