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하 34장 - 요시야 : 말씀을 들을 수 있게 되다 (대하 34:1-33)


1. 벌써 1주일 째 말씀 묵상 글을 쓰지 못하고 있다. 어린이 캠프, 주일, 그리고 아내의 입원... 물론 매일 말씀을 묵상하고 하루를 보냈지만 차분히 앉아 글을 쓸 여유가 나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말씀이 삶에서 살아 있다는 느낌이 약화되고, 그러다보니 뭔가 못견디게 불편하다는 느낌이 내내 들었다. 1주일 내내 이빨을 닦지 않은 것 같은 그런 느낌... 이 불편한 느낌을 접하면서 지난 1년 6개월 동안 거의 매일 같이 해온 말씀 묵상 글 나눔이 마치 하루 2-3번 이닦이 하듯 내 삶을 일상 속에서 떠받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며 기분이 좋아 졌다. 일주일 만에 이제야 겨우 이를 닦는다.


2. 8살에 왕위에 올라 31년을 다스리다 39세에 죽은 요시아(1). 그의 생애는 등극 후 8년(16세), 12년(20세), 18년(26세)으로 구분된다. 등극 제 8년 비로소 다윗의 하나님을 찾았고(3), 12년 유다와 예루살렘을 정결케 했으며(3), 18년 그 땅과 성전 정결을 마치고 성전을 수리하기 시작한다(8). 그리고 마침내 모세의 율법책, 곧 말씀이 발견되어 들려진다. 


3. 왕이 된지 18년이 지나서야 요시야는 비로서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자리에 선다. 사람 인생이 80년인 것은 괜한 것이 아니다. 열심과 진심이 있다고 다는 아니다. 모세가 80살이 되어야 했듯, 아브라함이 75세에서 100세까지 25년을 기다려야 했듯, 예수님이 30년을 기다리고 공생애를 시작해야 했듯, 사도 바울이 회심 후 바로 복음을 전했으나 그 복음이 16년 후에나 공식적인 인정을 받을 수 있었듯, 시간은 그것 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 그러니 시간이 흐른다고 조급해 하지 말아야 한다.


4. 바른 신앙의 대상을 확인하고, 우상들이 제거되고, 성전이 정화되고, 성전이 수리되고 비로서 말씀이 들려진다. 내게 요즘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있어 운동력이 있다면 그건 그냥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제거 되어야 할 것이 제거되고, 정화 되어야 할 것들이 정화 되었기 때문이다. 내게 요즘 여전히 말씀이 벽에 부딛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면 그건 말씀이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제거 되어야 할 것이 제거되지 않고, 정화 되어야 할 것들이 정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5. 모세가 전한 율법 책은 아마도 헌금한 돈을 넣어 두는 궤와 관련하여 발견된 듯하다(14). 사람들은 돈 얘기는 좋아하지만, 헌금 얘기는 싫어한다. 하지만 헌금과 관련된 나의 경험은 드려진 만큼의 결핍을 통해 더 깊이 만나게 되는 하나님의 은혜의 체험들이다. 드려지고 나눠진 결핍은 내 삶을 하나님과 연결시켜주는 민감한 통로이다. 내 손에 쥐고 있는 것으로 산다 생각할 때는 결코 경험할 수 없는 일들을 손에 있는 것을 놓을 때 경험한다. 


6. 발견된 모세의 율법책이란 아마도 신명기일 것이다. 특별히 신명기 28장 이후의 말씀일 것이다. 하나님을 떠난 백성에 대해 하나님의 징계가 임한다는 내용이다(21). 그 말씀을 듣고 요시야는 옷을 찢고 마음을 찢는다(19). 백성들도 그에 동참한다(30). 나는 그런데 다른 어떤 왕도 아닌 요시야 때에 이 말씀이 발견되어다는 것이 참 감사하다. 8살에 왕위에 올라 지난 18년 이상 한결같이 다윗의 하나님을 섬겼던 왕, 그 요시야 시절에 이스라엘의 멸망과 유다의 사로 잡혀감에 대한 말씀이 새롭게 발견되어 들려진다. 그러니 그 징계는 단지 불순종에 대한 징계만이 아닌 더 깊은 뜻이 내포된 하나님의 행동이다. 


20세 이상의 이스라엘이 다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할 때에 모세 또한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채 죽는다. 그러니 가나안에 들어간 자들은 그들이 모세보다 높은 경건을 가졌기 때문이 아닌 순전한 은혜로 가나안에 들어가게 된 것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하나님은 그래서라도 모세를 가나안에 들여 보낼 수 없었는지 모른다. 온 이스라엘에서 우상의 잔재를 치우고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며 살 수 있는 모든 장치와 제도와 규례를 정비했던 요시야 시대에 발견된 포로됨에 대한 말씀은 그래서 절망 아닌 희망을 담고 있다. 므낫세 때 신명기가 발견되었다면, 아하스때 포로로 끌려감이 선언 되었다면 그건 절망이다. 그러나 요시야 때 포로가 예고 된다면, 포로로 떠나가는 자들에게도 희망이 있다. 


7. 과거가 어떻고, 미래가 어떻게 예언되든, 오늘 우리가 할 일은 단순하고 분명하다. 그것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여호와를 순종하고 그 계명을 지켜 행하는 것이다(31). 포로기라는 어두운 미래가 예견되는 그 때, 요시야와 백성들은 여전히 목숨을 다하여 여호와를 사랑할 것을 맹세한다. 그런 자들에게 과거나 미래는 더 이상 결정적인 삶의 인자가 아니다. 결정적인 삶의 인자는 오로지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며 오늘을 사는 것이다. 그런 자들은 그 눈으로 재앙을 보지 않을 것이다(28). 평강을 누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