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의 말 (요12:1-8)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않았느냐?"(5)

 

경건해 보이는 이 말, 너무도 당당한 이 말, 가난한 자를 생각하는 듯한 이 말을 그러나 '요한'은 '도둑의 말'(6)이라 단언한다.

말이라고 다 말이 아니다.

뒤에 놓인 의도와 생각이 말이지 겉으로 드러난 명분이 말이 아니다(6a).

말이라고 다 말이 아니다.

실제로 행하는 행동이 말이지 입에서 나온다고 말이 아니다(6b)

 

그럴듯한 명분이나 누구나 들어도 '옳아 보이는 말'이 말이 아니라

지극히 비싼 향유를 누군가의 발에 붓고 머리털로 그 발을 닦는 사랑이 말이다(3).  

이 글을 쓰면서 나는 도대체 말이라는 것을 하고 사는지 생각한다.

'그는 도둑이라'(6) 귓가에 맴도는 '요한'의 말이 내 영혼을 깨우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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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따라 살기 (요12:9-50)

 

예수를 따라 산다는 거창한 문구 앞에(26) 누가 감히 손을 들고 '내가 바로 그 사람이요!'라 말할 수 있을까?

그런데 바울은 손을 들고 말한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고전 11:1).

 

바울의 당당한 선언엔 두 가지 중요한 이해가 놓여 있다.

하나는 스스로를 예수의 종으로 이해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예수의 죽음을 본 받을 때에만 그의 생명에도 참여할 수 있다는 역설에 대한 이해이다.

 

예수를 따라 사는 자는 '그를 섬기는 사람' 곧 그의 '종'이어야 하는데(26), 바울은 항상 예수를 그의 주인으로 알아, 그를 섬기는 종으로서 살았고,

예수를 따라 사는 자는 이 세상에서 자기의 목숨을 미워해야 하는데(25), 바울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고(빌 3:10-11) 죽는 자리에 서서 매일을 살았다(고전15:31).

 

예수를 메시야라 믿으면서도 출교가 두려워 드러내놓고 말하지 못하던 많은 이들이 있었다(42).

'요한'은 이들을 가차없이 '하나님보다 사람의 영광을 더 사랑한 자들'이라 평가 한다(43).

예수를 믿었으니 혹 구원에 이를지는 몰라도, 예수를 따라 살지 않았으니, 하나님은 이들을 중히 여기지 않을 것이다.

"나를 섬긴다면 반드시 나를 따라 살아야 한다. 나를 따라 사는 자는 하나님이 그를 중하게 여기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