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9장~10장 – 저주, 언약, 축복


홍수가 끝나고 하나님은 창조의 그날처럼 사람들을 축복하시며 생육과 번성을 명한다(9:1). 그러면서 노아와 그 후손과 땅의 모든 생물과 언약을 맺는다(9:9,10). 그들을 결코 땅을 덮는 홍수로 멸하지 않겠다는 것이다(9:11,15). 생육과 번성의 축복과 멸하지 않겠다는 약속? 이 둘은 뭔가 서로 어울려 보이지 않지만, 그것이 노아 홍수 이후의 세상의 현실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고, 하나님은 자기 형상을 따라 사람을 지으셨다(9:6). 그래서? 그러니 사람의 피를 흘리거나 그를 죽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9:5,6). 창조의 그날 아담은 동물들에게 이름을 주었다. 그러나 홍수 이후 동물들은 사람을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9:2).


분명 창조의 그날처럼 땅이 물에서 나오고, 땅이 생명을 피워내고, 그 위에서 사람과 동물들이 생육하고 번성하도록 복을 받는데, 그런데 그렇게 시작된 땅의 현실은 분명 그 때와는 전혀 다르다. 땅을 멸하지 않겠다는 약속이 필요하고, 하나님의 형상이니 죽일 수 없다는 금지가 필요하고, 동물들이 너희를 두려워할 것이라는 안전장치가 필요하다. 하나님께서 이렇게까지 세상을 보존하시고 인류의 번성을 지켜가시며(9:19) 뜻하시는 역사의 목표란 도대체 어떤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아브라함의 부름에 담겨있다. 곧 ‘땅의 모든 족속이 아브라함 안에서 복을 얻는 것‘(12:3)이다. 그러니 하나님은 단지 세상을 보존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인류에게 복을 주시고자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범죄와 악함으로 인하여서 좌절되거나 포기되지 않는다.


창조의 그날 하나님이 기쁨의 동산 에덴을 심듯(‘나타’), 노아는 포도나무를 심는다(‘나타’). 선과 악의 지식나무에서 먹고 자신들의 벗은 몸을 보고 부끄러워 스스로를 가린 사람을 향해 ‘누가 너희보고 벗었다고 뭐라고 하더냐(‘히기드’)?’ 말하시는 하나님의 물음에 아담은 ‘아무도 뭐라고 한 사람은 없습니다’ 답했을 테지만, 포도나무의 소산을 먹고 벌거벗은 아버지를 본 함은 밖으로 나가 그의 형제들에게 ‘아버지가 벗었다’며 ‘뭐라고’ 한다(‘히기드’). 하나님이 범죄한 아담에게 가죽옷을 지어 그의 몸을 덮어주었다면, 셈과 야벳은 ‘뭐라 하는’ 함의 이야기를 듣고 그의 아버지의 몸을 덮어준다. 하나님이 범죄한 아담으로 인해 땅을 저주하며 '아담이 땅을 갈아도(‘아바드’) 땅은 엉겅퀴를 낼 것이라' 하셨지만, 노아는 함으로 인해 그 아들 가나안을 ‘형제들의 종(‘에베드’)이 되라’고 저주한다(9:25). 유사해 보이는 패턴 속에서 사람들은 스스로 ‘에덴에서의 범죄와 추방’을 반복하다.


가나안과 함은 정말 종의 종이 될까? 그러나 이어지는 셈과 함과 야벳의 족보는 노아의 저주와는 사뭇 달라 보이는 인류의 모습을 보여준다. ‘창대하리라’던 야벳은 단 네 절에 걸쳐 짧게 기록되고(10:2-5), 셈의 종으로 저주 받은 가나안의 아버지 함의 자손은 미스라임(이집트), 구스, 시날의 바벨, 갑도림(크레타), 가나안 등에 이르기까지 큰 성을 쌓으며 힘을 과시하는 당대 세계의 패권자로 나타난다(10:6-20). 


그리하여 역사는 노아의 저주에서 예상되는 방향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움직여가는 듯이 보인다. ‘종으로 저주받은 자’가 오히려 ‘주인처럼 다스리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은 어떻게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는’ 그 일을 성취해 내실 수 있을까? 이 물음의 답은 이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이 하게 될 것이고, 고난 받는 여호와의 종(‘에베드’)이 하게 될 것이며, ‘주인’이지만 ‘섬기는 자(‘아바드, 에베드’)’로 오신 예수께서 하게 될 것이다(요13:14).


역사는 노아의 저주를 뒤집는 듯 보이지만, 하나님은 그 저주 자체를 뒤집어 온 땅에 복을 가져다 주실 것이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고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창50:20). 창세기는 이렇게 끝이 나고, 나는 하나님이 빚어가시는 거대한 역사 속에서 오늘을 살아가며 그의 복을 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