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5장 - 맹세 없이 사는 삶 (마 5:33-37)

"맹세를 해야만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이미 정죄 받은 사람이다."라는 말이 있다. (아마 필로의 말이었던 듯)

맹세의 남용은 신뢰하기 어려운 사회의 반영이고, 신뢰가 붕괴된 사회 곧 서로 믿을 수 없는 사회란 서로가 억울한 사회일 수 있다. 서로가 억울하고, 서로가 대접을 받지 못하고, 서로가 피해자이고, 서로가 참고 살고, 자기 말고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사회일 수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처럼 말이다.

맹세에 관한 이야기 가운데 아주 끔찍한 이야기가 있다. 유대 랍비 학가이가 전하는 이야기다.

어떤 여인이 다른 집에 가서 반죽하는 일을 도왔다. 그런데 그녀 머리 덮개 가장자리에 묶어 두었던 두 데나리온이 그녀가 모르는 사이에 일하면서 떨어져 그만 빵 반죽 속으로 들어가서 반죽되었다. 집에 돌아와서 여인이 두 데나리온을 찾으니 없었다. 온 집을 다 뒤져도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반죽했던 여자네 집에 찾아가 두 데나리온을 내어 놓으라고, 분명 너희 집에서 떨어졌다고 말했다. 여자가 듣고 대답했다. "내가 알지 못한다. 내가 안다면 내가 내 아들을 묻게 될 것이다." - 그런데 정말 그녀의 아들이 죽어, 아들을 묻게 되었다. 아들을 묻고 돌아오는데, 그녀는 누군가가 하는 얘기를 들었다. "만약 그녀가 정말 그 데나리온에 대해 몰랐다면, 그녀는 아들을 묻지 않았을 것이다."... 그 얘기를 듣고 그녀는 대답했다. "내가 안다면, 내가 내 다른 아들을 묻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 아들 또한 죽어 묻게 되었다. 사람들이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서 왔을 때, 식사 중에, 어떤 사람이, 빵에서 두 데나리온을 발견했다. 그 이후 속담이 생겼다. "깨끗하든 그렇지 않든 어떤 경우에도 맹세하지 말아라."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 보다는, 자기 아들의 생명을 두고서라도 맹세 하지 않을 수 없는 인간의 상황과 그로 인한 비극 그리고 그 비극에서 헤어 나올 방법이 없는 인간의 현실을 보여 주는 이야기로 읽을 수 있다.

예수님의 '그렇다, 그렇다', '아니다, 아니다'는(37) 맹세하지 않을 수 없는 세상 가운데서, 맹세 없이 살아가는 삶에 대한 이야기이다(34). 진실과 정직이라는 이상과 그 이상을 따라 살아갈 수 없는 인간에 대한 이해 속에서 예수님의 해답은 맹세 없는 삶이었다.

맹세 없는 삶은 어떻게 가능한가? 나의 '그렇다'에 누군가가 함께 '그렇다' 말해 주고, 나의 '아니다'에 누군가가 함께 '아니다' 말해 줄 수 있다면, 우리는 맹세 없이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37). 상대방의 '그렇다'에 나도 '그렇다' 말해 주고, 상대방의 '아니다'에 나도 '아니다' 말해 줄 수 있을 때 우리는 맹세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다.

예수께서 잡히던 밤, 두 사람이 예수를 부인한다. 베드로와 유다다.

베드로는 '죽기까지 따르겠다'는 스스로의 맹세를 부인하며 '그를 모른다'고 맹세한다. 스스로 한 맹세를 지켜낼 수 없는 자신과의 마주침이다. 진심이 있었으나 그 진심을 지켜낼 실력이 없는 자신과의 마주침이다. 그러니 통곡하고 우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마주침을 통해 베드로는 예수 앞에서 사는 삶, 맹세 없이 사는 삶으로 나아간다. 유다의 자살은 맹세의 정신에서 나온다. 돌이킬 수 없는 잘못에 대한 책임을 내가 짊어지고 가겠다는 맹세의 사고에서 나온다. 그러나 그렇게 한들 그것이 누구에게 유익할 것인가? 그렇게 가지 않고 돌이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데로 나왔다면, 그는 죽지 않고 살수 있었을 것이다.

머리의 한 터럭도 희거나 검게 할 수 없는 맹세를 짊어질 수 없는 사람이 맹세 없이 살아가는 삶을 위해 필요한 것은 서로의 '그렇다'에 대해 함께 '그렇다'라고 말해주고, 서로의 '아니다'에 대해 '아니다'라고 말해줄 수 있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