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6장 - 왕의 길 (마16:13-24)

갈릴리 북쪽으로 40Km쯤 올라가, 아우구스투스를 위해 헤롯이 헌정한 신전이 있는, '가이사'라는 황제의 타이틀을 지니고 있는, 세상 권세가 손에 잡힐 듯이 느껴지는 가이사랴 빌립보에 이르러(13), 그곳에서 예수가 묻는다. "사람들이 인자에 대해 무엇이라 하느냐(13)? 그리고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15)?"

그에 대한 베드로의 대답은 "당신"이 메시야,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다(16). 다 해진 옷에 냄새 나는 머리, 몇 몇 제자들과 더불어 먼 길을 걸어, 가이사의 이름을 따서 이름 지어진 도시에 올라온, 촌사람 예수에 대해, 베드로가 하는 고백은 '당신'이 왕입니다 이다. 이것이 놀라운 것이다.

옷이 사람을 만들고,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자리가 사람을 키우기도 한다. 그러나 왕의 자리란 어떤 자리일까? 누가 있어 과연 한 나라를 온전히 다스리는 왕이라 할 수 있을까? 왕의 자격이 있는 자를 왕으로 앉힌다면, 누가 과연 그 자리에 앉을 수 있을까? 파스칼은 "장자가 왕이 된다는 이 불합리는, 그것이 불합리하기 때문에 합리적이다."라고 말했다, 왕의 자격이 있어 왕이 될 자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베드로와 제자들은 예수에게서, 아무 것도 없는 예수에게서 참된 왕을 알아 보았다. 그분이야 말로, 진정한 왕이다. 그가 진짜 왕이기에, 그에겐 왕의 옷이나 왕관이 필요 없다. 왕궁이나 위압적 건물도 필요 없다. 그것 없이도, 초라한 옷을 입고 있음에도, 그는 왕이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어떻게 이것을 알게 되었을까? 그와 함께 살며, 그를 따라 살며 베드로와 제자들은 그것을 느꼈다(cf.이미 14:33). 누구라도 그분과 함께 산다면, 그를 따라 다닌다면, 그자는 예수가 진정한 왕임을 알아 볼 수 있을 것이다. 나 또한 그렇게 그분을 알아 보았고 제자들처럼 고백하게 되었다. 예수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 왕입니다! 라고...

왕관도, 권세도, 돈도, 화려함도, 명품도 필요 없고, 오리혀 그것들이 누추해지는 존재, 그분이 예수다. 그럼에도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본말이 전도되어, 예수 자신의 왕 됨을 알아보기보다, 왕관과 권세와 돈과 화려함으로 예수를 장식하려고 한다.

정당한 신앙고백을 가진 베드로의 실패는(22), 메시야이신 예수가 로마가 아닌 십자가를 향해 간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 탓이다. 메시야 예수가 비록 지금은 초라하지만, 언젠가 진정한 왕권을 드러내시고 '암행어사 출도'를 통해 모든 세상 권세자들을 잡아들일 것이라는 기대 속에 길을 잃은 것이 베드로의 문제였다.

그러나 메시야 왕으로서 예수가 걸어가신 길은 황제의 권좌가 아닌, 십자가였다(21). 왕은 말만 하면 모든 일이 이루어지는 자다. 그 말을 이루기 위해 밑에 있는 사람들이 죽을 똥을 싸던 상관이 없다. 그러나 예수는 자기 목숨을 버려, 자기 백성을 구하러 온 왕이다.

왕관도 군사력도 돈도 없어 보이며, 어처구니 없게도 자신들 곁에서 함께 살지만, 바로 그가 왕이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 자들, 버려진 자들, 소망이 없는 자들을 찾아가, 그들을 고치고, 삶을 돌려주고, 밥을 차려주고, 겨우 물고기와 보리 떡이 전부인 식탁을 함께하는 그가 왕이다. 그것이 천지의 주인이신 메시야 왕이 걸어온 길이고, 걸어갈 길이다. 그를 뒤따른다는 자들이 걸어갈 길이다(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