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4장 - 두 잔치 (마14:1-21)


세례 요한의 잡힘과 죽음 이후 예수는 항상 어디론가로 가신다. 요한이 ‘잡힘‘을 듣고, 갈릴리로 갔다가(4:12), 스불론 납달리 지경의 가버나움에 가서 사신다. 그 의미를 마태는 흑암에 앉은 자들이 빛을 보았다고 이해한다. 세례 요한의 ‘죽음의 소식‘을 듣고, 예수는 배를 타고, 따로 빈들로 가신다(13). 가시는 곳에 무리가 따른다. 예수가 그들을 불쌍히 여겨 병자를 고치시고, 말씀을 전하신다. 두 번의 경우 모두 가난한 자, 병든 자, 연약한 자, 멸시 받는 자, 고통하는 자들과 함께함이다.

이러한 예수의 사역을 촉발 시키고, 그 방향을 더욱 분명히 하게 된 계기엔, 세례 요한의 잡힘과 그의 죽음이 있었고, 그 배후엔 헤롯과 헤로디아가 있었다. 세례 요한을 잡아 옥에 가둔 것도 헤롯이고, 그를 죽인 것도 헤롯이다. 헤롯 안티파스다(BC 4–AD 39). 그 헤롯의 뒤엔 그런데 헤로디아가 있었다. 헤롯이 세례 요한을 잡아 옥에 가둔 것도 헤로디아 때문이고, 그를 죽인 배후에도 헤로디아가 있었다.

1-2절에서 분봉왕 헤롯은 예수의 소문을 듣고 두려워한다. 12-13절에서 예수는 요한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듣고는 그곳을 떠나 배를 타고 따로 빈들로 간다. 빈들(에레모스) 곧 광야는 - 세례 요한의 활동 무대였고, 예수께서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 40일을 금식하신 곳이기도 하다.

요한의 죽음은 십자가를 앞둔 예수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했을 것이다. 그래서 아마도 예수는 세례 요한의 활동무대였던 그곳을 다시 찾고 싶었을지 모른다. 동시에 다른 곳이 아닌 그곳에서부터 예루살렘으로의 여정을 시작하고자 했을 것이다.

여기 나오는 분봉와 헤롯은, 헤롯 대왕의 아들 헤롯 안티파스다. BC 4년 헤롯 대왕이 죽자 유대 땅은 네 지역으로 갈라져 통치된다. 그 중 갈릴리와 베레아 지역을 헤롯 안티파스가 다스리고 있었다.

헤로디아는 하스모니안 왕가의 마리암과 헤롯 대왕 사이에 태어난 아리스토불로스의 딸이다. 아리스토불로스에게는 딸 헤로디아 외에 아들 헤롯 아그립바가 있었다. 하스모니안 왕가의 피를 이은 헤로디아는 아버지의 이복 형제인 빌립의 아내가 된다. 헤로디아는 그러나 헤롯 안티파스와 눈이 맞는다. 그리하여 남편 빌립과 이혼을 하고, 헤롯 안티파스와 결혼한다.


그런데 이 결혼은 이후 많은 문제들을 불러온다. 헤롯 안티파스의 부인은 나바테아의 공주 파샬리스였다. 그런데 안티파스가 헤로디아와 결혼하자, 이 공주 파샬리스가 나바테아 왕국으로 도망한다. 그로 인해 이후 나바테아 왕 아레타스와 갈릴리의 헤롯 안티파스 사이에 전쟁이 벌어진다. 물론 본문이 기록하고 있는 그 당시에 벌어진 일은 아니고, 시차를 두고는 있지만(37년), 그런 위험을 잠재적으로 낳을 수 있는 일이 헤롯과 헤로디아의 결혼이었다.

그러니까 헤롯이 빌립의 아내를 취한 이 일은 형제의 아내를 취한 윤리적으로 불편한 일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아주 민감한 사안이었던 것이다. 헤롯 개인의 치정과 관련된 일에, 애매한 민중들이 피를 흘릴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렇게 왕가에서 일어나는 일은 그 결정 하나 하나가 민중의 목숨을 좌우하는 것임에도 아무런 민중에 대한 고려 없이 이혼과 결혼이 행해졌던 것처럼, 세례 요한의 죽음 또한 왕가에서 일어난 하룻밤의 잔치자리의 여흥 속에 결정되고 처리되고 만다.

모든 결정의 기준이 되어야 할 하나님의 뜻도, 백성들의 고단한 삶도 그들의 결정의 기준이 되지 못했다. 뜻밖에도 헤롯의 결정 기준 중 하나는 두려움이었다(cf.2,5,9). 헤롯은 민중이 두려워 요한을 죽이지 못했고(5), 사람들 앞에서 한 맹세가 두려워 요한을 죽인다(9).

세례 요한이 죽은 소식을 듣고 예수는 자기 앞에 놓인 십자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겠지만 그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결정을 한다. 고통스럽지만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하고, 내면의 갈등과 아픔이 있지만 생명을 베풀고 나누는 길을 걸어야 한다. 그것이 예수의 결정이었고, 그것이 우리의 결정의 기준이어야 한다. 그 기준의 차이가 헤롯과 예수의 길을 다르게 만들었다.

헤롯과 헤로디아 - 왕과 공주이니 행복했으리라 쉽게 말 할 수 있을까? 헤롯 자신, 자산의 형 아리스토불로스의 죽음에 일조한다. 그런데 그 형 아리스도불로스의 딸 헤로디아를 사랑(?)하게 된다. 자기 형제에게서 그녀를 빼앗아온다. 마음 편한 결정도, 달기만 한 사랑도 아니었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헤롯가의 사람들도 고통스럽다. 그러나 매일의 일상 속에서 삶과 죽음의 문제와 마주해야 했던 민중의 고통에 비할 수 있을까?

진정으로 고통스럽다면,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예수가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으로 갔다는 말을 듣고, 사람들은 걸어서 그곳까지 이른다(13). 그들은 사랑하는 남자가 없었겠는가? 사랑하는 여인이 없었겠는가? 그들에겐 이혼과 시련의 아픔이 없었겠는가? 상처와 떠나 보낸 사랑하는 이들이 없었겠는가? 전쟁의 땅 갈릴리에서, 전쟁으로 잃은 남편과 아들은 얼마나 많았겠는가?

누가 더 고통스러웠는가를 따지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이 그들을 어디로 끌고 가는가?을 따져야 한다. 그것이 중요한 것이다. 오늘 나의 삶의 순간이, 만남이, 고통과 갈등이 나를 어디로 이끌고 가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고통스러운 선지자의 질책과 양심의 갈등과 고통이 그들을 이끌고 간 곳이 어디인가가 중요한 것이다.

어찌 보면 헤롯 가는 너무나도 얽히고 설켜서 그곳에서의 삶은 일반 민중의 삶과는 완전 다를 수 밖에 없다고, 거기서 헤어나올 길은 없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은 바울과 더불어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가 된다(행13:1).

고통스럽지만, 아니 고통스럽기 때문에 더욱이 예수께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그러면 그는 광야에서 베풀어지는 잔치 자리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예수는 내면의 고통과 막막함을 가지고 광야로 간다. 하나님을 만나러 가는 것이다. 그는 거기서 가난한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을 고치신다. 하나님 나라는 그곳에 임한다.

무리들은 광야 같은 삶을 산다. 누가 더 고통스러운가를 따지는 것, 누가 더 많이 가졌는가를 따지는 것은 하릴없는 일이다. 그 모든 풍부와 부족이, 아픔과 눈물이, 그들의 괴로움이 족한 오늘이, 그들을 이끌어 갔던 곳은 예수님이 계신 곳이었다.

다 떨쳐 버리고, 그에게 달려 나갈 수 있다면, 그는 복 있는 사람이다. 헤롯과 헤로디아는 너무 멀리까지 떠나 왔다. 돌아가고자 한다면, 그 길은 너무도 멀고 고통스러운 길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예수께로,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한다.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그가 새롭게 하지 못할 중한 죄는 없고, 그가 고치지 못할 병도 없다.

두 잔치 자리가 나온다. 헤롯의 풍성한 주연과 광야에 조촐한, 그러나 풍성한 식탁. 나는 어디에 있으며, 어떤 길을 가려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