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36– ‘고통에는 뜻이 있다'? (36:1-33)

 

엘리후가 말한다. '고통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8).... '고통은 1. 지금껏 살아온 삶을 돌아보아 스스로를 바로잡게 하고(9) 2. 간과해온 죄를 깨달아 돌이키게 하며(10) 3. 악을 심판하여 경계로 삼게 하고(17) 4. 하나님의 전능하신 통치와 다스림을 드러내어 알게 한다(22).' – 고통에 대한 엘리후의 설교이다.


고통에는 엘리후가 말하듯 죄와 벌이라는 측면만 있는 것이 아니다. 고통은 사람을 성숙하게 하고, 삶에서 보다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성찰하게 하며, 고통 당하는 다른 이들을 이해하게 하고, 억울하게 고통 당하는 자들과 연대하여 억울함을 푸는 것 보다 더 귀한 것이 삶에 있음을 체험하게 하며, 무죄한 자가 당하는 고난을 통해 죄의 죄 됨을 확인시킬 뿐 아니라 그것을 넘어 죄인이 스스로 돌이킬 기회를 열어 주기도 한다. 


고통이 아니라면 알 수 없는 것이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불의의 사고로 갑작스럽게 자녀를 잃거나, 억울하게 자신의 권리를 빼앗김 당하거나, 이유 없는 모욕과 조롱으로 고통을 겪는 등 이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고통이 그것으로 얻을 수 있는 무언가로 인해 손쉽게 정당화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고통을 가하면서 ‘이것도 너에게 유익이 될 것이니 너는 불평하지 말아라‘는 견강부회가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니 말이다.

 

사람들이 고통에 뜻이 있다 여기는 이유는 다만 권선징악의 개념 때문만은 아니다. 고통 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자신이 당하는 고통에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불길함이다. 의미 없는 고통만큼 고통스러운 것은 없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당하는 고통, 민족의 독립을 위해 당하는 고통, 정의와 평등을 위해 당하는 고통, 역사의 발전을 위해 당하는 고통 등 그 대의 만으로도 충분한 일에 대하여 사람들은 그 고통을 단지 억울하다고만 생각지 않을 것이다. 성숙을 위한 고통, 깨달음을 위한 고통, 보다 중요한 것을 붙잡기 위한 고통, 성공을 위한 고통 등 그런 고통이라면 그렇게 고통스럽기만 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욥의 고통은 도대체 무엇을 위한 고통이란 말인가? 이후 다시 열명의 자녀를 얻고, 그 딸들이 누구 보다 아름다운들 그것이 이전에 잃은 자녀들에 대한 보상이 될 수 있단 말인가?

 

고통에는 의미가 있어야만 한다는 생각이 오히려 더욱 큰 고통이 되는 경우들이 있다. 고통은 당하고 겪는 것이다. 고통하고 아파하는 것이다. 고통에 의미를 부여하여 고통을 견딜 수 있는 것으로 만들려는 시도가 무엇을 의도하는지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고통의 상황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때로 고통보다 더한 폭력일 수 있다. 욥에 대한 엘리후의 말은 그렇게 들린다.


고통의 의미는 고통 당하는 자 자신이 그 고통을 겪어 나간 후 스스로의 삶에 대해 비로소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일 뿐, 곁에 있는 다른 누군가가 던져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나타나서 그의 고통의 이유에 대해 설명하지 않는다. 그의 고통에 심오한 뜻이 담겨 있음을 말하지도 않는다. 그는 다만 욥의 말이 정직하고 합당한 것이었음을 말한다. 그는 다만 자신이 욥의 모든 말들을 다 듣고 있었음을, 욥의 모든 고통의 날들에서 눈을 돌리거나 그를 외면하지 않았음을 말한다.

 

고통에는 혹 뜻이 없을지 몰라도, 고통 중에 나는 혼자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