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32장 - 진심이면 다가 아니다 (욥 32:1-22) 

 

박영선 목사님은 욥기 32장 설교에서 엘리후의 말을 진심이면 다가 아니다라는 말로 평가한다. 말이 속에 가득하여 터져 나오는 엘리후의 말은(18) 그의 말처럼 어떤 사심이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22). 그러나 그의 진심과 사심 없음은 하나님을 위하여하는 말은 될지언정(36:2) ‘욥을 위하여하는 말은 아니다(34:36). 엘리후의 말에 욥의 세 친구는 입을 닫고(15), 욥 또한 대답할 기회를 찾지 못한다. 욥의 세 친구는 어리석고 무능한 자로, 욥은 스스로 지혜롭다 하나 악인과 같이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로 정죄된다(34:36-37).

 

엘리후의 말은 이중적이다. 한편 그의 말은 욥의 세 친구들의 이야기와 전혀 다르지 않다. 하나님은 정의롭고, 그는 의로 다스린다. 욥은 스스로 의를 주장하며 하나님과 논쟁하고자 하지만 하나님이 사람의 논쟁에 다 응대할 아무 이유가 없다(13). 실은 하나님은 이미 말씀하셨지만 사람이 듣지 못할 뿐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징계하고 교훈하여 그를 바른 길로 인도하신다. 그러나 욥은 회개한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있다.

 

다른 한편 엘리후의 말은 38장부터 이어지는 하나님의 말씀과 연결되는 부분을 갖고 있다. 사람이 하나님을 온전히 이해하고 측량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같은 내용을 가지고도 엘리후와 하나님의 결론은 다르다. 하나님은 욥을 옳다고 하나, 엘리후는 욥을 꾸짖고 정죄한다.

 

하나님은 측량할 수 없다. 그런데 욥은 그런 하나님과 논쟁하며 자신이 하나님보다 더 의로운 양 행동한다. 그것 자체가 욥이 이미 틀려있다는 증거다’ - 엘리후의 논리는 이리로 흐른다. 그러나 하나님은 달리 말한다. 하나님은 측량할 수 없다. 무한한 지혜와 능력으로 천지 만물을 지으셨고, 또한 사람을 지으셨다. 사람이 능히 그의 길을 측량할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욥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러니 하나님의 설명이 듣고 싶다. 이해할 수 없는 이 일에 대해 설명을 해 달라고 욥은 호소한다. 하나님은 그런 욥이 옳게 말했다며 욥을 편드신다(42:7).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욥은 전통적 하나님 이해가 다 담아 낼 수 없는 현실로서 자기 자신을 제시한다. 친구들은 그런 욥을 전혀 이해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여전히 인과론과 권선징악의 틀 속에서 하나님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엘리후는 욥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아는 듯 보인다. 그러나 엘리후는 욥의 말을 욥이 하나님보다 의롭다하며 스스로를 내세우는 것으로 폄훼한다. 그러자 눈 앞의 욥의 현실의 이해할 수 없음은 욥의 태도의 용납될 수 없음으로 인해 논쟁 밖으로 밀려간다. 엘리후의 이야기 속에서 욥을 위한 자리는 없다. 욥의 친구들을 위한 자리도 없다. 하나님을 위한 자리 또한 없다.

 

진심이라고 다가 아니다. 진리를 말한다고 다가 아니다. 누구에게 말하고 있는가? 누구에 대해 말하고 있는가? 무엇을 위해 말하고 있는가? 언제 말하고 있는가?를 살펴야 한다. 하나님은 욥의 말을 다 듣고, 그의 말이 아니라, 그의 답답함에 응답한다. 그의 마음에 대고 말씀하신다. 엘리후는 마음에 가득 쌓인 참된 말들을 쏟아 놓는다. 그러나 그의 말은 누구의 말누구를 위한 말도 아닌, 그저 말일 뿐이다. 그런 말들에 진심이라는 말을 붙일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 그러나 말을 하는 당사자는 가득 차오르는 말로 인해 스스로 착각한다. 그것이 진심이라고.


말 한마디, 그를 위해 들어주고, 그를 위해 건네줄 수 있는 그 작은 여유가, 인간에겐 왜 그리 어려운 일인지.... 가슴에 가득 쌓여 오르는 말들을 비워내고 덜어내는 것이 인간에겐 왜 그리 어려운 일인지... 엘리후의 말을 듣다 내 안에 쌓이는 말을 보며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