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18장 – 빌닷, 분노 가운데 말하다 (욥 18:1-21).


‘욥의 울분‘을 듣다 못하여 빌닷이 말한다(4). 그러나 정작 분노하고 있는 자는 욥이 아니라 빌닷이다(19:29). 욥은 분노를 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분노에 당황하여 하소연하고 있다(16:9; 19:11). 정작 분노해야 하는 자는 욥인데 오히려 친구들이 욥에 대해 분노한다.


앞서 엘리바스가 하나님 경외를 져버린 자에게 재난이 임한다며 욥의 불경건을 지적했듯, 빌닷은 욥에게 일어난 재난이 악인과 하나님을 모르는 자에게 마땅한 몫이라며 욥을 하나님을 모르는 악인으로 몰아 세운다(5,21).


문제를 만나면 사람들은 원인과 해결책을 찾고자 한다. 해결책은 원인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재난을 만난 욥에 대해 친구들은 원인과 해결책을 찾아 제시한다. 그러나 욥은 그들의 진단이 틀렸다고 한다. 원인은 자신의 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해할 수 없는 행하심이며, 해결책은 그러니 회개가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 그 이유를 들어 보는 것이다. 그런 욥을 친구들은 받아들일 수 없다. 원인은 그의 불경건과 죄악이며 해결책은 자복과 회개다. 이 단순한 자기 인정을 욥은 거부한다.


그러자 두 번째 대화에서 이미 친구들은 욥을 하나님을 모르는 악인으로 선고하며 그를 몰아붙인다. 빌닷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욥의 상처에 다시금 상처를 가하는 말들로 가득하다. “악인은 질병이 그 피부를 삼키고, 그 뿌리가 마르고, 후손도 없고, 남은 자도 없으며 그 이름이 전해지지 않으리라(13,16,17,19).“ 그들은 왜 이토록 잔인하게 말하는가? 그들은 왜 이렇게 분노하는가?


누군가의 고통을 오랜 시간 바라보는 일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렇기에 사람은 빨리 해결책을 찾아 불편한 그 상황을 정리하고자 한다.


7일 동안 말을 잃었던 친구들도 그러했으리라. 욥이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면 끝나는 일이다. 비록 아직 아무 상황도 개선되지 않았지만, 질병이 치료된 것도 아이들이 되살아 온 것도 아니지만, 그럼에도 답을 찾아 주면 자신들은 욥의 고통에서 고개를 돌릴 수가 있다. 이제 문제의 해결은 그들의 손을 떠나 욥에게 달려 있게 되니 말이다.
 
그런데 욥은 그들의 진단과 처방을 거부하고 미결의 상황 속에서 고통 당하는 자로 그들 앞에 서 있다. 그러니 불편하고 불편하다. 그들 또한 고통하는 욥과 함께 매일의 시간을 답 없이 견뎌가야 한다. 고통을 살아내야 한다. 고통 속의 오늘은 고통이다. 고통 속의 답 없는 오늘은 더 큰 고통이다.


‘아니다. 답은 있다. 욥이 죄를 지었다. 그래서 그가 고통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에게 해답을 주었다. 그런데도 고집을 피우는 욥은 악인이며 불경건한 자이다. 그러니 그에게 고통은 마땅하다.‘ – 고통하는 욥을 지켜보며 해답 없이 하루를 살아내는 고통에서 그들은 자신들을 지켜내고 싶다. 그들은 욥에게 분노한다.


분노하지 말자.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분노하지 말자. 해답을 주었으나 받아들이지 않는다며... 분노하지 말자. 지나온 여러 달의 시간에 대해...(7:3).


분노가 일어나면 차라리 돌아보자. 지금 나의 분노는 무엇 때문인지, 그리고 누구에 대한 것인지.


고통을 면하고자 깃털처럼 가벼운 해답을 던져주고 자리를 뜨는 대신, 지난 여러 달, 욥의 고통과 하소연을 말 없이 들으시며 그 곁을 지켜 오셨던 그분처럼, 그의 곁에서 함께 살아가자. 비록 내게는 지금 답이 없어도, 하늘에는 이 모든 일들의 증인이 계신다...(16: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