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5죽음의 족보에서 생명을 살다 ( 5:1-32)

 

아담의 톨레도트(족보)(1). 대개 ‘~의 톨레도트라고 하면 ‘~후손 또는 ‘~ 이후의 이야기가 실리게 된다. ‘데라의 톨레도트는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아브라함의 톨레도트는 이삭의 이야기가, ‘야곱의 톨레도트는 요셉의 이야기가 실리는 식이다. 그런데 '창조의 톨레도트'(2:4)도 아닌 '아담의 톨레도트'에 느닷없이 하나님이 아담 위에 들어와 서신다(1,2)

 

아담은 130 세에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고 이름을 셋이라고 하였고, 930 세를 살고 죽는다. 셋도 105 세에 에노스를 낳고 912 세를 살고 죽는다. 그렇게 '낳고, 죽는 것'으로 끝나는 '아담의 족보'의 가장 첫 자리에 아담 자신이 아닌, 아담을 자기 형상으로 낳으신 하나님이 서 계신다(1,2). 자기 형상을 따라 사람을 낳고 그 이름을 아담이라 지어 주신 분은 하나님이시라고, 아담을 낳으신 아버지는 하나님이라고 그렇게 힘주어 말하고 있는 것이다(2).


아브라함으로 이어지기까지 낳고 낳고를 반복하면서도 죽었다는 이야기가 없는 '셈의 족보'와 달리(11:10-26) 아담의 족보는 900년씩을 살아도 결국 죽고마는 '죽음의 족보'로 기록된다. 그런데 그 죽음의 족보에 하나님은 톨레도트의 구조를 파괴하면서까지 굳이 아담을 낳은 아버지로 들어와 서시는 것이다.

 

죽음으로 끝나는 사람의 족보에서 하나님은 자기 발을 빼지 않으신다. 죽음은 너희 탓이지 내 탓이 아니라며 그들을 내버려 두지 않는다, 자기 형상으로 낳고 이름까지 붙여준 사람의 아버지로서 굳이 자신을 나타내신다.

 

그리하여 이 죽음의 족보에 또 하나의 이상한 기록이 등장할 수 있게 된다.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던 에녹, 그에겐 죽었다는 기록이 없다(24). 죽음의 족보에서 생명을 살다간 에녹에 대해 성경은 '그가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말한다. 하나님과 동행하던(할라크) 에녹을 하나님이 취하셨다(라카흐).

 

에녹의 삽백 년 하나님 동행은 사실 하나님의 삼백 년 에녹과의 동행이다. 아담에서 노아에 이르기까지 죽음을 살던 인류에 대한 하나님 동행이다. 하나님은 자기 형상으로 낳으신 사람을 내버리지도 않았고, 떠나지도 않았다. 그들의 아버지로서 하나님은 자기 자리를 떠날 생각이 결코 없으시다. 사람은 하나님을 잊고, 사람은 그와 함께 살지 않아도, 하나님은 사람을 잊지 않고, 그와 함께 사셨다.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1:10-12)


죽음을 살던 아담의 자손들의 아버지로서 그들 곁에서 그들과 동행하셨던 분, 임마누엘 예수로 찾아 오시고, 세상 끝날까지 그들과 항상 함께 하시는 분, 사람 가운데 장막을 치고 들어오신 분, 믿고 고백하는 자들의 삶 가운데 성령으로 거하시며 생명을 누리게 하시는 분, 그 분 하나님과의 동행은 그러니 내가 먼저 시작한 것이 아니다.


창세기 5장, 인류의 삶이 시작되는 첫 자리부터 그가 먼저 우리 삶 가운데 찾아와 우리와 동행하여 주신다. 나는 다만 나와 동행하시던 하나님을 삶의 어느 때쯤인가 마주쳐 발견하고, 그와 함께 사는 삶을 지각하며 살게 되었을 뿐, 아마 므두셀라를 낳은 어느 날 에녹도 그랬으리라. 하나님과 300년을 동행한 에녹이 아닌, 에녹과 300년을 동행한 하나님, 그분 하나님을 내 삶에서도 누린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