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위로의 하나님 (고후 1:1-11)

- 2013년 4월 4일 목요일

 

마케도니아에서 고린도에 편지를 쓰면서(7:5; 8:18) 바울은 마음에 위로와(7:6) 기쁨이(7;7:9) 있다. 고린도후서에만 29위로(파라칼레인)’라는 말이 사용되고(11명사형, 18동사형), 10번이 편지의 서두(1:1-11) 나타난다. 아이러니한 것은 곳에고난(5,6,7)’환란(4,6,8)’이란 단어 또한 넘쳐난다는 것이다. 고난도 많고, 환란도 많은데, 위로와 소망 또한 넘친다(7).

최소한 6개월이 넘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마음이 근심과 고통으로 가득했던 날들... 바울은 고전16장에서 밝힌 계획(고전16:5) 변경하여 갑작스레 고린도를 방문했다(15). 그런데 번째 방문에서(cf.13:1,2) 바울은 예기치 못한 어려움을 겪고(13:2; 2:1) 그곳을 떠나 다시 아시아로 가게 된다. 바울의 번째 고린도 방문에서 정확하게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수는 없지만, 방문은 바울에게 근심과 걱정, 눈물을 낳는 방문이 되었다(2:1-4). 이후 바울은 소위눈물의 편지’(2:4)라는 것을 디도 편에(2:13) 고린도에 보내게 된다(7:8,12). 엄한 어조로 쓰여졌을 편지를 보내놓고(7:8) 바울의 마음은 염려와 걱정으로 가득하다. 그런데 그렇게도 기다리던 디도가 오지 않는다. 디도를 기다리던 바울은 에베소에서 드로아로 옮겨가고(2:12), 드로아에서 바다를 건너 마케도니아로 간다(2:13). 드로아에 있을 복음의 문이 열렸음에도(2:12) 바울은 그곳을 떠나 마케도니아로 간다. 고린도 교회와 성도들이 눈에 밟혀 마음을 잡을 수가 없다(2:13). 바울의 근심과 염려가 얼마나 컸었던가! 더구나 마케도니아에 도착한 바울은 그곳에서도 어려움과 환란을 겪는다(7:5). ~! 그런데... 마침내...디도가 돌아온다(7:6). 디도가 마침내 고린도 성도들의 회개와 사모함의 소식을 가지고 돌아온다(7:7,9)

위로의 하나님’, 그가낙심한 ’(7:6) 바울을 위로하셨다(3). 고후 1장은 근심과 환란뿐 아니라 위로와 소망도 넘친다. ‘낙심(타페이노스)’ 대개 부정적인 감정으로만 그려진다. 낙심한 자는 그러나 그로 인해겸손(타페이노스, cf.11:29)’ 이를 수도 있다. 겸손은 자기의 부족을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크심을 아는 것이다. 겸손은 자기가 아닌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이다. 낙심한 자의 눈에 자기 자신만이 보일 , 낙심은 절망이 된다. 그러나 낙심한 자의 눈에 하나님이 보일 , 하나님만이 보일 , 그는 하나님에게서위로소망 발견하게 것이다(7). 6개월이 넘었을 쓰디쓴 고통과 근심의 시간을 통과하면서(2:1,3,7; 7:10; 9:7) 바울은 질그릇 같은 자신 안에 담겨진 보배를(4:7) 보게 된다. 바울이 만났던위로의 하나님’, 이제 이야기를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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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끼는 마음 (고후 1:12-24)

 

 

진심을 보이기 위해 맹세를 해야만 한다면 그건 참 고통스러운 일일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목숨을 걸고, 하나님을 증인으로 불러, 고린도 성도들을 향한 자신의 마음을 보이고자 한다(23).
 
에베소에서 고린도전서를 쓸 때(고전16:8) 바울은 마케도니아를 지나 고린도로 가서 그곳에서 예루살렘으로 갈 계획이었다. 그런데 바울은 계획을 바꾸어 고린도를 두번 방문하고자 했다. 고린도 성도들을 한 번 더 만나 은혜를 나누고 싶었기 때문이다(15).

 

그런데 바울은 고린도에 도착하여 뜻하지 않은 상황을 만나게 된다. 성도들의 도덕적인 문제(13:2), 바울의 사도권에 대한 공격(10장-12장), 예루살렘 연보 모금의 중단(8:11) 등등 갖가지 문제가 한꺼번에 터져 나왔을 것이다. 그러한 일들을 겪으면서 바울은 고린도를 떠나 마케도니아로 갔다가 그곳에서 고린도로 돌아가지 않고(23) 오히려 아시아(에베소)로 간다(cf.8).

 

이로 인해 바울과 고린도 성도들 사이의 골은 더욱 깊어질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한번 뱉은 자신의 말을 바꾸어 고린도가 아닌 아시아로 간다. 그 이유를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 성도들을 아꼈기 때문’이라고 밝힌다(23).

 

사람이 살아가는데 오해가 없을 수 없다. 그러나 서로가 서로에 대해 진심을 갖고 있다면 풀어지지 못할 오해 또한 없다. 여기서 ‘진심’이란 ‘상대방을 아끼는 마음’이다(23). 바울이 목숨을 걸고 증거하고 싶었던 것은 자신의 정당함이 아니라, 그들을 아끼는 자기의 마음이었다.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모든 약속이 ‘예’가 되는 것은(20) 예수께서 자기의 옳음을 증거하고자 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우리를 ‘아끼셨기’ 때문이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고’(롬8:32) 우리를 ‘아끼신' 하나님… 그 마음을 바울에게서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