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와 영광 (17:1-8)



제자들의 발, 자신을 버리고 도망갈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는 - '사랑의 행함'(13), 예수의 제자로서 사는 삶의 근본 원리에 대한 - '가르침'(14~16), 그리고 이어지는 것은 - '기도'(17).  '행함'이 없는 '가르침'이 공허하고, '가르침'이 없는 '행함'이 맹목이듯, '기도' 없는 '행함' '가르침' 또한 과녁을 맞출 수 없다(1).  



'이 말씀을 하시고 난 뒤' 예수는 하늘을 우러러 '기도'한다(1). '영생'이 하나님과 예수를 '아는 것'이라면(3), 영생은 '기도하는 자'만이 누릴 수 있다. '안다'는 것은 경험하고 체험한다는 것이다. 함께 산다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경험하고, 체험하며, 함께 살 수 있는 하나의 길이 있다면 그것은 '기도'. 그리고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체험하는 자가 향하는 하나의 길은 '하나님의 영광'의 추구다(1,4,5).

'
그것의 가장 그것다움이 드러날 때' 사람들은 그것을 '영광스럽다고 한다. 하나님의 영광이란 - 하나님의 가장 하나님다운 모습이 드러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자리는 그런데 (능력, 세력, 힘의 과시가 아닌...) '십자가'(17:1 cf.12:23,28). 십자가야말로 하나님의 가장 하나님다운 모습이 나타난 자리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하라고 주신 일을 이루는 것'으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했다'고 한다(4). 예수의 제자로서 나 또한 마찬가지다(6). 예수께서 하라고 내게 주신 일을 이루는 것 - 그것이 내가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길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예수님께 주어진 일이란 한마디로 '십자가를 지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내게 주어진 일 또한 한마디로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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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을 살았으니 이제 어느 정도 나에게 주어진 일이 무엇인지 보일 법도 한데, 나는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그러니 '기도'한다. 매일 지라고 주어지는 '자기 부인의 십자가'(9:23 - 날마다...) 감당한다. 내 삶을 통해 '하나님의 가장 하나님 다우심'이 드러나는 '영광'이 내게 누려지기를 '기도'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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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몸을 입다(요 17:9-19)

 

사람은 자기 마음 속의 품어지는 말을 따라 산다. 마음에 웅성거리는 말들이 세상에서 비롯된 말이면 그는 세상을 따라 살 것이고, 마음에 웅성이는 말이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말이면 그는 하나님을 따라 살아갈 것이다(19). 어찌보면 삶은 이런 말과 말의 싸움이다. 하루를 시작하고 마무리하면서 마음을 사로잡는 말이 무엇이냐가 그 사람의 하루를, 인생을 결정할 것이다. 그 마음 가운데 예수의 말이 살아 있는 사람은 예수님이 가진 충만한 기쁨을 그 또한 갖게 될 것이고(13), 그 마음 가운데 세상의 말이 웅성대는 사람은 '망할' 것이다(12). 

 

오늘도 예수의 말을 마음에 품는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듯, 그의 말이 내 삶을 빚어가려면, 나 또한 예수님을 따라 '기도'하지 않을 수 없다. "거룩하신 아버지여!(11) 오직 우리를 악에서 지키시고(15) 진리의 말씀으로 거룩하게 하소서(17,19). 예수의 말이 마음에 품어진 자들은 당신의 것입니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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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됨 (요17:20-26)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이 있다면, 그건 사람이 하나 되는 일이다(cf. 마18:20). 오죽하면 예수께서 '너희 중 두 사람이 그 원하는 일에 있어서 한 목소리(심포니)를 낼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지 하나님께서 들어주실 것이다'라고 말씀하셨겠는가?(마18:19) 제자들과의 마지막 밤, 예수님의 기도는 제자들의 하나됨을 향해 간다(11,21,22,23).

하나됨의 모델은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예수의 하나됨이다(11,22). 제자들이 하나됨을 이루는 방식은 그러니 아들 예수가 아버지 하나님과 하나됨을 이루는 방식을 따라 이뤄져야하고, 그럴 때에만 가능해진다.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예수가 하나됨을 이루는 방식은 특정한 내용에 대한 동의나 몇몇 조건들에 대한 합의가 아닌 서로가 상대방 안에 거하는 것이다(21,23)."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가(21) 그 분들의 하나됨의 방식이다. 상대방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23,26), 상대방의 영광을 위해 자기의 영광을 주는 것(1,4,5,22,24), 상대방의 것을 자기 것으로 지켜주는 것이다(6,24). 그러니 이 둘은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고,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입니다."(10)라고 말할 수 있다.

세상의 방식은 "내 것은 당연히 내 것이고, 네 것 또한 내 것이다"일 것이다.
내가 가질 수 없다면, 너도 절대 가져서는 안 되고, 네가 가진다면, 나도 반드시 가져야만 하는 것이다. 상대방의 영광을 위해 자기의 영광을 포기하는 일은 어리석음이고, 상대방의 것을 지켜주기 위해 내가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미친 짓이다. 내가 네 안에, 네가 내 안에가 아니라, 내가 네 위에, 네가 내 아래가 마땅한 일이다. 그러니 두 사람 조차 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길이 없다.

예수님의 기도는 더욱 놀라운 쪽으로 나아간다. 예수님은 자신의 영광을 제자들에게 주겠단다(22). 아니 이미 주었단다(22b). 그런데 예수가 제자들에게 준 그 영광이란, 사실 아버지께서 예수께 주었던 영광이란다(22a). 아버지가 자기에게 준 영광을, 제자들에게 주기 위해, 예수는 십자가의 길을 간다. '하나됨' 이라는 말은 그러니 '누군가를 위한 십자가'를 '자기 십자가'로 여겨 지고가는 '사랑' 없이는 감히 꺼낼 수 없는 말이다(23,26).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십니다. 부디 그들로 온전히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세상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그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알게 해 주십시오.”(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