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지 말고 먼저 보라 (요 9:1-41)

 

"생각하지 말고 먼저 보라!" - 방황하던 20대 중반, 내 인생을 바꾸어 놓았던 비트겐슈타인의 말이다.

"이 거리에 마지막 집이란 있지 않다, 왜냐하면 뒤에 또 지을 수 있으니까! - 라고 말하지 말아라. 생각하지 말고, 보라! 이 거리엔 마지막 집이 있다." - 원인의 원인의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며 사변을 일삼기 전에 실재하는 현실을 보라는 말이다. 언어의 본질을 추구했던 초기 언어이론에서 돌이켜 언어의 실질적인 쓰임 속에서 진실을 마주하고자 했던 후기 언어이론의 방향을 그림처럼 보여주는 말이다.

 

이 거리엔 마지막 집이 있고, 나는 이렇게 육체를 가지고 존재하며, 이렇게 나는 일상을 살면서 윤리- 종교적 언어를 말하고 그것은 또한 타인과 소통된다. 이곳, 이렇게 눈에 보이는 일상이 모든 신비가 숨쉬는 현장이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닌 말할 수 없는 것에 놓여있다"는 <논리철학논고>의 마지막 말을, 그는 '인생에서 보다 중요한 것'이 무수히 말해지는 일상 언어에 대한 <철학적 탐구> 속에서 새롭게 풀어낸다. 사람이 말할 수 없다 여겼던 것들 - 인생의 의미나 존재의 이유, 하나님, 영원 같은 말들 - 그것들은 사실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에 의해 무수히 '말해지고' 있다. 그 말은 소통된다. 그러니 의미가 있고 힘이 있다. 생각하지 말고 먼저 삶을 들여다보면 '말할 수 없는 보다 중요한 것들'이 말해지고 있음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나면서부터 눈이 멀었던 한 사람이 예수를 만나 눈을 뜨고 보게된다. 그렇게 눈을 뜨고 예수를 보았던 그는 예수를 믿는다(38). 그러나 모세를 읽고 이해하며 경건의 길을 가고 있다고 스스로 여겼던 바리새인들은 예수가 행한 일을 보기보다 먼저 생각한다. "예수는 안식일에 일을 했다(14). 모세의 율법을 어겼다. 그러니 그는 죄인이다(16). 그러니 죄인인 그가 기적을 일으킬 수 없다. 그러니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저 사람은 본래 장님이 아니었다(18). 그는 거짓말을 하고 있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이다(9)."

 

눈을 떴으나 '보지는' 않고 다만 '생각만' 하고 있는 자들에게 소경이었던 자의 말은 벼락처럼 들린다.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25). 나면서부터 소경된자는 처음부터 '죄인'이었다(2). 사람들은 '소경'으로 태어난 그를 '보기'전에 먼저 '생각'했다. '그 또는 그의 부모가 죄를 지었다. 그러니 이 자가 소경으로 태어났다'라고.... 그러나 생각하기 전에 먼저 그의 소경됨을 '보셨던' 예수님은 그를 불쌍히 여기시어 그의 눈을 만지시고 그로 보게 하셨다.

 

사람은 보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을 본다. 눈으로 보면서도 눈에 보이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자신이 지금껏 믿어왔던 것을 무너뜨린다 여길 때, 사람들은 일어난 사실을 부정한다. "그런 일은 없었다. 죄인인 예수가 소경의 눈을 뜨게할 수 없다. 눈을 떴다는 사람은 본래 소경이 아니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이다." 그리고는 다시 자기 믿음의 자리로 돌아가 눈을 감고, 생각 속에서 살아간다. 생각~! 생각 속에서는 모든 일이 다 가능하니까... 이 거리에 '마지막 집'을 또 지을 수 있으니까... 그러나 사람은 생각 속에서 태어나지 않고, 생각 속에서 죽지 않는다.

 

"예수께서 말했다. 나는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고 이 땅에 왔다."(39) 예수께 나아간다. 모세로 예수를 읽다가 소경된 자들을 뒤로하고, 눈을 떠, 참으로 보고자 예수께 나아간다. '인자' 곧 사람의 아들이 되신 '하나님'을 예수에게서 본다. 꼼짝 달싹 못하는관념속의  '무한자 하나님'이 아니라,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발라, 나로 보게 하시는 하나님을 그에게서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