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한 사람 (요3:22-36)

 

눈에 보이는 땅 뿐 아니라 하늘이라는 것이 참으로 있다면, 눈에 보이는 세상 나라가 전부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 안에서 참으로 현존한다면, 예수 안에서 하늘을 맛본 자는 또한 하늘의 뜻을 따라 살아가야 한다, 세례 요한이 그렇게 살아갔듯...

 

예수는 제자들과 함께 유대 땅으로 들어가 거기서 세례를 베풀었다(22). 요한은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베풀었다(23). 애논이 정확이 어딘지 확정할 수는 없지만, 요한은 예수가 유대 땅으로 들어가 세례를 베푸는 동안 자신이 세례를 베풀던 요단 동편에서 떠나 북쪽으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세례를 베풀었다. 가장 가능성이 있는 장소는 엘리야 전승이 가리키는 요단 저편 '그릿 시냇가'(왕상17:3)와 관련된 곳이다. 유세비우스가 가리키는 애논과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바로 그 때 요한의 제자와 한 유대인 사이에 정결 의식에 대한 변론이 일어난다(25). 문맥과 정황상 요한이 세례 주는 장소와 관련된 논쟁일 가능성이 충분하다. 예수는 요단을 떠나 유대 땅에 들어와 거기 거하며 그곳에서 세례를 베푼다. 거룩한 땅에서 씻음의 의식을 행한다. 그에 반해 요한은 지금껏 요단 건너편에서 세례를 베풀었고, 만일 애논이 엘리야 전승이 남아 있는 그 곳이라면 이 또한 요단 건너편이다. 애논이 유세비우스가 가리키는 곳이라 해도 그곳은 사마리아와 데가볼리 접경지역이니 이 또한 거룩한 땅이 아니다. 씻음의 의식을 행하는데 거룩한 땅이 아닌 곳에서 정결의 의식을 행한다. 요한의 제자들이 정결의식에 대한 변론 이후 요한에게 와서 예수의 세례에 대해 언급하며 사람들이 다 그에게로 가더라고 이야기하는 배경에는(26) 이런 정결의식에 대한 변론이 놓여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요한은 여전히 엘리야 전승을 따라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서의 사역을 이어간다. 하늘이 주신 것, 하늘이 주신 사명, 하늘의 뜻을 따라 지금껏 살아왔다. 어려서부터 광야에서, 광야의 음식과 광야의 옷을 입으며, 말라기 선지자의 엘리야 전승과 이사야의 광야 전승을 한데 아우르는 자로서 매일을 살아왔다. 마침내 자신이 증언할 자, 메시야가 왔다. 그가 거룩한 땅으로 들어가 그 곳에서 세례를 베푼다. 요한은 요단을 떠나 애논으로 간다. 

 

낙향처럼 보이는 그의 여정은 그러나 기쁨의 여정이다. 메시야 예수의 사역은 이제 시작되었다. 예수는 하늘이 주신 메시야로 살아가기 위해 유대 땅으로 들어가 거기 유한다. 신랑을 기뻐하는 신랑의 친구로서(29) 세례 요한은 하늘이 주신 '광야의 소리'로서 살아가기 위해 마지막까지 광야에 머문다.  

 

삶의 참된 성공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아는 것이며(33), 하늘의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삶의 길'을 마지막까지 내 발로 걸어가는 것이다(27-30). '최고'가 아닌 '유일'을 꿈꾼다는 카피문구처럼 모든 사람의 삶은 '유일'하기에 또한 '최고'이다. 내게 주어진 '유일한 삶'은, 운명처럼 자동적으로 내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 길을 자기 길로 선택하여, 마지막까지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을 통해서만 얻어진다. 하나님이 요한에게 주신 것 -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 메시야의 오심을 준비하는 엘리야.... 짧은 30여년, 마지막까지 하늘이 그에게 주신 '유일한 삶'을 완성하는 자로 살았던 '최고의 사람' 요한 - 나이 마흔이 넘어 바라보는 그의 뒷모습이 크고 거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