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 속한 사람 (요3:1-21)

 

바리새인으로 유대인의 관원인 니고데모가 중에 예수를 찾아온다(2). 니고데모는 이후 요한복음에 등장한다. 때마다 그는 예수 편에 선다. 당국자나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잡고자 할 때에 그는 저들 편이 아닌 예수 편에 서고(7:50), 율법에 따르면 저주 받아 죽은 나무에 달려 죽은 자 예수의 장례에 참여한다(19:39). 단 한 번의 만남, 그 한 번의 만남만으로도 사람의 인생은 넉넉히 달라진다.

 

예수에 따르면 사람은 두 가지 기원을 갖는다. 한 가지는 모든 사람이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이고, 다른 한 가지는 참된 삶을 위해 모든 사람이 가져야만 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은 이고(6a), 참된 삶을 위해 모든 사람이 가져야만 하는 것은 이다(6b). 모든 사람은 어머니의 뱃속에서 태어날 때 육을 얻는다(4). 그러나 육신적 생명이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생명의 전부는 아니다. 영에 의해 위로부터 태어날 때(3)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15).

 

사람이 어떻게 영에 의해 위로부터 태어나게 되는지는 신비다(8). 그러나 그렇게 태어난 자는 육신을 가진 자가 육신의 생명을 누리듯 영생을 누린다. 그는 하나님 나라를 보고(3),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5). 하늘에 속한 자, 예수가, 자신이 보고 아는 것을 말하듯(11), 그들 또한 하나님 나라를 보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 하나님 나라를 겪어 알게 되고, 그렇게 알게 된 것들을 말하게 된다(11).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16) 이렇듯 새로운 실재를 보고, 듣고, 만지고, 경험하고, 누린다는 것이다. 영생은 이미 이곳에서 누려진다. 영생을 누림의 증상은 그들이 하나님 안에서 힘을 얻어 살아가는 것이다(21). 예수를 믿지 않는다는 것은(18) 새로운 실재에 대한 감각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 안에서 이미 누려지는 영생에서 배제된 채(18) 가치 없는 것을 행하고 썩어질 것을 행하며, 영원하지 않은 것을 행하며(20) 살아가게 된다. 육체가 악하고 영이 선하다는 것이 아니라, 영이 없는 육체, 영생 없는 생명은 영원하지 않은 것만을 행하게 된다는 것이고, 그 결국은 망하는 것이다(16).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로고스)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라…(요일 1:1-2)

 

한밤중에 예수를 찾아와 그를 만난 자, 니고데모는 예수에게서 무엇을 보았을까? 요한일서의 저자처럼 그 또한 예수에게서 영원한 생명을 보고, 듣고, 만지고, 맛보았던 것일까? 그랬기에 그 또한 예수 편에 서서 예수를 증언하는 자가 되었던 것인가?

 

종교적인 용어들로만 채색된 글들은 잘 읽혀지지 않는다. 더욱이 세상을 둘로 가르고, 한쪽은 악과 어둠이고 한쪽은 의와 빛이라 말하는 표현들은 거북스럽기 짝이 없다. 그렇지만 예수가 온 것은 한쪽을 악하다 하고 한쪽을 의롭다 하기 위함이 아니라, 심판하고 정죄하기 위함이 아니라, 구원하여 영생을 주기 위함이다. 이 또한 구원이 필요하다 진단된 세상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난감한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육과 땅이 전부가 아니라 영과 하늘이 있다고, 자신은 그 영과 하늘, 영원한 생명과 하나님 나라에서 왔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다. 너무도 종교적인 이야기를 들은 니고데모는 웃어 넘길 것인가? 아니면 예수가 보고 듣는다는 그 하늘에 관심을 가질 것인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차카게 살겠다거나 인생의 목적이 달라졌다거나 하는 것만이 아닌, 새로운 실재가 있음을 듣고, 보고, 들어가고, 만지고, 겪고, 누린다는 것이다. 하늘을 누림, 영생을 누림, 하나님 안에서 힘을 얻어 살아감, 빛 가운데서 행함그런 것이 없다면, 아직 위로부터 나지 않은 것이거나 아니면 예수의 말이 헛소리거나 둘 중 하나 일 것이다. 니고데모는 예수에게서 내가 보고 있는 하늘을 보았을까? 예수 때문에 때로 목숨을 걸고, 때로 지위를 거는 니고데모의 삶에 비해 예수에게서 하늘을 보았다는 내가 삶에서 걸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