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수의 때 (계14:1-20)

 

가장 확실한 사실임에도 가장 실감나지 않는 사실이 있으니, 그것은 내가 죽는다는 사실이다. 사람은 누구나 이 땅을 살다 마침내 죽는다. 우리 모두에겐 저마다의 마지막 때가 있다. 그런데 성경은 그 마지막 때를 추수의 때와 비교한다(15). "거두소서. 땅의 곡식이 다 익어 거둘 때가 되었습니다."(15).... 그러니 사람은 그냥 살다 그냥 사라지는 것이 아나다.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삶의 완성 곧 추수인 것이다.

 

죽음은 오늘의 일상이 끝나는 마지막이 아니라, 일상의 수고와 행실이 결실하여 열매로 맺히는 삶의 완성이다(13). 죽을 때, 사람은 돈도, 집도 가져갈 수 없지만, 자신이 행한 일들의 기억은 가져갈 수 있다(13c). 기억은 몸에 남고, 영혼에 남는다. 기억은 단순한 과거 사건에 대한 영상이 아니라, 오늘 나의 현재의 모습 속에 고스란히 살아 숨쉬는 현존이다. 모든 기억 곧 과거의 모든 나의 삶은 내 머릿 속 어딘가 아련한 추억의 형태로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 나의 말과 오늘 나의 내면의 정서와 오늘 나의 사고의 근육을 형성하고 있는 현재 그 자체이다. 그러니 죽음은 그냥 삶의 마침표가 아니라, 살아온 모든 삶의 완성이고, 마지막 때는 곧 추수 때인 것이다(15).

 

두 종류의 추수가 있다. 그러니 두 종류의 삶이 있다. 어린양 곁에 선 십 사만 사천의 삶이 있고(1), 짐승 곁에서 세상 권력과 짝하며 살아온 삶들이 있다(8-9). 자신을 팔지 않고, 거짓 없이 살아온 삶이 있고(4), 자신을 팔아 음행하고, 거짓으로 살아 온 삶이 있다(8). 두 종류의 삶이 있다면, 두 종류의 추수가 있다. 곡식처럼 곳간에 거둬지는 추수가 있고(16), 진노의 포도주 틀에 던져지는 추수가 있다(19).

 

과거도 미래도 그러니 모두 오늘 내 몸 안에 함께 살아 있다. 추수의 때를 내다보며 점검한다. 점검할 것은 두 가지다. (1) 내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이 쓰여 있는지(1b), 곧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이 나의 제1정체성인지 (2) 속량함을 받은 자들만이 부르는 노래를 나 또한 부르고 있는지(3)가 그것이다. 이십대... 내가 그토록 마음으로 불렀던 노래들 중 어떤 노래들을 이제 나는 더 이상 부르지 못한다. 노래는 가사와 곡조를 안다고 그냥 다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노래는 영혼, 그 가장 깊은 삶의 중심에서 나온다. 십 사만 사천, 그들만이 부를 수있는 영혼의 노래! 그 노래를 부르며 살다, 추수의 때를 맞을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