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길 (4:1-14)

2012-11-08 목요일

기쁨의 동산 에덴 한 가운데 생명나무와 선과 악의 지식 나무가 있었다. 그 나무()엔 하나님의 명령이 걸려 있었다. 그로 인해 두 나무는 각각 생명의 길과 죽음의 길을 나타내게 되었다.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자는 생명을 누리고(1), 그 명령을 지키지 않는 자는 죽음을 겪을 것이다(3). 그 한 예가 바알브올 사건이다(3; 25). 바알브올 사건으로 2 4천명의 이스라엘이 죽는다. 적당히 죽는 길이 없다면, 적당히 생명을 누리는 길도 없다. 살든지 죽든지 둘 중 하나일 뿐, 가감 없이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 생명을 누리든(2), 몇몇 계명만을 따르다 죽음을 겪든, 둘 중 하나일 뿐이다.

 

사람인 내가 어떻게 그 모든 계명을 항상 따르며 살 수 있을까?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할 때 가능해진다(10). 하나님 경외는 무섭고 두려우신 하나님에 대한 인식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항상 내 곁에 가까이 계신 하나님에 대한 인식에서 생겨난다(7b). 그리고 하나님께서 항상 가까이에 계신다는 인식은, 기도할 때 생겨난다(7a). 기도하면, 기도할 때마다 그분은 항상 내게 응답해 주시기 때문이다(7a). 기도-> 하나님 체험 -> 하나님 경외 -> 말씀에 순종함 -> 생명을 누림의 사이클을 따라 매 순간 살아 가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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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상 제작 금지 ( 4:15-40)

2012-11-09 금요일

인격은 어떤 무엇으로 규정할 수 없는 무한성을 갖는다. 인격이 갖는 무한성은 자유라는 말로도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인격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고 어떤 고정된 형상 안에 가두어 두는 자는, 살아있는 존재가 아닌 죽은 목석과 상대하는 것일 뿐이다(cf.28). 누군가에게 신비의 영역, 무한의 영역, 변화의 영역, 자유의 영역을 남겨두지 않는 자는 살아 있는 상대가 아닌 죽은 대상과 관계할 뿐, 그런 관계 속에 사랑이나 질투가 들어설 자리는 없다(24).

 

애굽에서 나를 건져 내신 하나님(34), 불 가운데서 내게 말씀하시는 하나님(36), 나와 내 자손에게 복과 은혜 주시길 원하시는 하나님은(40) 내게 반응할 여지를 남겨두시고, 내가 사랑으로 반응하길 기다리신다(29). 혹 어리석은 길을 가면, 먼 곳으로 나를 흩어 보내서라도 스스로 돌이킬 기회를 주신다.  

 

나 또한 그를 기대하며, 그를 기다린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그에게 나아가며 나를 만나러 오실 하나님을 기대한다(29). 살아계신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설레는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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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피성 (신4:41-43)

                                                                                                                                            2012-11-10 토요일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지키라는 긴 당부가 끝나고(1-40), 모세에 의해 선포된 율법(토라)을 소개하는(44ff.) 그 사이에 도피성에 대한 짧은 말씀이 자리한다. 문맥상 자연스레 이어지는 두 문단 사이를 어찌 보면 갑작스레 가로막고 있는 셈이다. 요단 동편에 각 지파에 하나씩, 3개의 도피성이 지정된다(43). 도피성은 원한 없이, 부지중에 살인한 자를 위한 곳이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한다. 그 실수가 때로는 누군가를 죽이는 치명적인 것이 될 수도 있다. 사람을 죽여 놓고 실수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그냥 용서될까? 실수일지라도 누군가를 상하게 하고 해치는 일은 용납될 수 없는 범죄이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그 행동에 어떠한 의도가 있지 않았다면, 그것은 원한에 의한 행동과는 구분되어야 한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도피성이다. 도피성은 사람을 해치는 일 그 자체가 갖는 심각성을 보여주며, 동시에 실수 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연약함을 보여준다. 내 안에 악의가 없다면, 상대방의 마음 또한 그럴 것이다. 악의로 보이는 마음도 돌아보면 연약하기에 생겨난 마음이다. 율법은 사람을 살리자고 주어진 것이지, 죽이고자 주어진 것이 아니다. 토라를 선포하기 전, 실수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을 위한 삶의 길을 먼저 확보해 주는 신명기 말씀을 따라, 함께 살아가는 길을 걸어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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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믿음의 싸움 ( 4:44-49)   2012-11-11 주일

 

요단 동쪽 벳브올 맞은편 골짜기, 그 땅에서 다시 한번 언약의 말씀이 선포된다(46). 이 언약의 말씀이 선포되는 자리는 헤스본 왕 시혼의 땅으로(46), 약속대로 이스라엘이 전쟁을 통해 기업으로 얻게 된 땅이다(47). 그러니 신명기는 약속대로 그 땅을 주신 하나님과 그 약속을 믿고 전쟁을 수행하여 땅을 얻은 이스라엘 사이에 재차 약속을 확인하는 언약의 책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언약은 호렙산 언약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간 자리에서 맺어지고 있다 할 것이다.

40년을 하나님과 더불어 살았다면 진전이 있어야 할 것이다. 성장과 성숙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스라엘은 이미 비롯 요단 동편이긴 하지만 이미 3지파가 약속하신 기업을 얻었다. 자기들의 삶 가운데서 하나님의 약속이 현실이 되는 것을 맛보았다. 그리고는 앞으로 나아가려 하기 전, 자신들에게 허락하신 약속의 내용이 무엇이며, 자신들의 언약의 의무가 무엇인지 다시 확인하는 것이다.

오늘 아침, 내가 서 있는 자리를 돌아본다. 내가 지금 서 있는 땅은 벳브올 맞은편 골짜기쯤인가? 아니면 아직도 세일 산 주위의 광야를 돌고 있는가? 믿음의 싸움을 싸워 승리한 경험이 있는가? 그 토대 위에서 선한 싸움을 계속하고 있는가? 앞으로 치러야 할 가나안 전쟁은 믿음의 싸움이지 능력의 싸움이 아니다. 갖추어야 할 것은 철병거가 아니라 우리 곁에 계신 하나님을 볼 줄 아는 눈과 그분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