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수기 9장 – 두 번째 유월절 (민 9:1-14)
 
제 2년 1월 14일, 애굽에서 나온 지 꼭 일년 되는 날에, 이스라엘은 시내 광야에서 두 번째 유월절을 지킨다(1).
 
지금까지 일정은 이랬다. 첫번째 유월절 (출애굽 제1년 1월 14일) – 시내 광야 도착(3월 1일) – 율법 수여(유월절 이후 50일, 말하자면 오순절) – 성막 완성 (제2년 1월 1일) - 두 번째 유월절 (2년 1월 14일)
 
민수기 7장의 제단 봉헌과 열두 지파의 헌물 봉헌은 성막이 완성된 제 2년 1월 1일부터 시작하여 12일간 이어진다. 8장의 레위인 봉헌은 아마도 1월 13일에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는 1월 14일에 두 번째 유월절이 지켜진다. 민수기 7~9장은 성막 봉헌 이후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며 이루어진 이스라엘 백성의 출정 준비를 담고 있다. 시간상으로는 그렇지 않지만 민수기 기록 순서를 따르면 이스라엘은 말하자면 두 번째 유월절을 지내고는 새로운 여정을 시작하는 것이다.
 
이 때 민수기가 관심을 가지고 기록하는 것은 시체 등으로 부정하여져서 1월 14일에 유월절을 지키지 못한 사람에 대한 규례이다(7,10). 그들은 한 달 뒤인 2월 14일에 유월절을 지킬 수 있다(11). 그렇게 하여 확인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은 어떠한 경우에라도 반드시 유월절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13). 타국인이나 거류인도 본토인처럼 유월절을 지킬 수 있다는 설명 또한 같은 강조를 갖는다(14). 타국인이든 거류인이든 본토인이든 유월절에 참여한 자가 하나님의 백성이다.
 
두 번째 유월절에 대한 민수기의 기록은 세 번째 유월절에 대한 여호수아 5장의 기록에 의해 그 의미가 더욱 분명하게 규명된다. 이스라엘 백성은 제 41년 1월 10일 요단 건너 길갈에 이르러 할례를 행한다(수4:19;5:2). 그날 그들은 유월절 양을 선택하였을 것이다. 41년 1월 14일, 이스라엘 백성은 할례를 행한 자로서 유월절을 지킨다(수5:14). 광야에서 태어난 자들은 할례를 받지 못하여 유월절을 지킬 수 없었는데 요단을 건너 길갈에 이르러 할례를 행함으로 그들은 마침내 할례를 행하고 유월절에 참여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
 
유월절과 할례는 육신적 생명의 죽음과 하나님 주신 생명이 공존하며 교차하는 이스라엘의 실존의 상징이다. 그들의 육신적 생명은 할례와 유월절 사건을 통해 상징적으로 죽었으나 그로 인해 그들은 하나님 백성으로서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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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9장 – 움직이는 하나님의 거처 (민9:15-23)

 

구름 네비게이션의 작동 방식에 대한 설명이 이어진다. 구름이 성막에서 떠오르면 이스라엘도 떠날 준비를 하고, 구름이 가다 멈추면 이스라엘도 멈춰 서야 한다(17). 이동의 속도와 방향, 체류의 기간은 오직 하나님이 정한다. 하루 이틀 한달 또는 일년이든 구름이 머무는 만큼 머물고(22), 구름이 움직이면 언제든지 바로 떠나야 한다(22).

 

그 때, 이스라엘의 머묾과 떠남을 지시하는 구름은 언제나 성막 위에 있었다. 짧은 본문에 ‘성막‘(‘미슈칸‘)이라는 말이 7번 쓰인다(15(*3),18,19,20,22). 독일어권 성경은 여기에 쓰인 ‘미슈칸(=거처)‘이라는 단어를 ‘텐트‘가 아닌 ‘집(‘Wohnung‘)으로 옮긴다. 회막(만남의 천막), 성막(거룩한 천막), 증거의 성막(언약궤 위 속죄소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천막) 등으로 쓰이는 것과는 다른 울림을 갖는'미슈칸'(거처,집)이 이동을 나타내는 문맥에서 7번 쓰인다. 말하자면 이스라엘은 어디를 가든 움직이는 하나님의 거처, 그가 거하는 집인 셈이다.

 

부모와 산다는 것이 부모의 말을 따라 살아간다는 것이듯 하나님과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을 따라 살아간다는 것이다. 부모와 함께 살아가는 이상 다른 삶의 방식이 있을 수가 없다. 본문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라는 말 역시 7번 사용된다(9:18(*2),20(*2),23(*3)).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후 40일의 정탐 끝에 하나님의 말과는 다른 말을 내뱉고는 그 말대로 40년을 광야에서 방랑하다 죽게 된다(14:28). 물론 다른 이들이 있었다. 여호수아와 갈렙, 마음에 성실한 대로 대답한 말이(수15:7) 곧 하나님의 말이었던 그들, 그들은 자신들의 입술의 고백대로 가나안 땅에 들어간다, 아니 이미 광야 그곳에서도 약속의 성취를 맛보는 자들로 살아간다.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침에 일어나서 넥타이 색깔을 고르는 정도에 불과하다는 말이 있다. 사람의 선택은 아침에 일어나서 회사를 갈지 말지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구름 네비게이션의 인도를 따라 길을 간다. 사실이지 방향을 구분하기 어려운 광야에서 인도하심을 벗어나 길을 간다는 것은 그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니 광야 길은 정해진 훈련의 코스를 밟아가는 것이다. 선택지는 많지 않다. 하나님의 말을 신뢰하고 그 말을 따라 걸어갈 것인가, 하나님의 말을 불신하고 그 말을 외면하고 걸어갈 것인가의 선택뿐이다.

 

40년 동안 하나님이 거처를 옮기실 생각이 없으시다면, 그와 함께 살아가는 자로서, 누구의 말을 듣고 살아야 하는지, 너무 오래 고민하지 말아야 할 일이다.

 
손에 칼을 들고 할례를 행했던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은 자기들을 향해 칼을 들고 서 있는 군대장관을 맞는다(5:13).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적들을 위하느냐?" 여호수아의 물음에 그는 "나는 너희를 위한다"고 답하는 대신 "나는 여호와를 위하는 군대장관으로 여기 있다"고 답한다(5:14)그러니 이제는 자신들이 누구를 위하여 서 있는지, 자신들의 칼로 베었던 것은 무엇이었는지, 그럼에도 누리고 있는 생명은 누구에게서 받은 것이며 누구를 위한 것인지 이스라엘이 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