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3) – 사랑을 요구하는 하나님

 

[37]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태22 37-40)

                                                                                                  

1. 나는 사진을 사랑하되 목숨을 걸고 사랑해라고 누가 말한다면 여러분들은 어떤 생각이 들까요? “나는 목숨을 걸고 ~을 사랑해라고 할 만한 것이 혹시 여러분들에게 있습니까?

 

 

2.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라는 말씀은 너의 전부를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네 전부를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라는 명령을 들을 때 여러분들에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무엇입니까?   (너무 과한 요구라는 생각 / 그렇게 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 / 그저 관용구처럼 요구되는 과장된 명령의 방식이라는 생각 / 아직까지 하나님 앞에 내어드리지 못한 것이 있나를 살펴 그것까지 하나님을 향해 드리고 싶은 열망……)

 

 

-> 자식까지 바친 아브라함의 순종을 접하거나,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나는 오직 여호와만 섬기겠다는 다니엘의 세 친구의 고백을 들을 때에 우리가 먼저 가져야만 하는 생각은, ‘나도 저들처럼 모든 것을 드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순종해야 할 텐데가 아니라, ‘도대체 저들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었길래 저들은 자식까지, 목숨까지 하나님 앞에 내 놓을 수 있었는가?‘라는 생각입니다. ‘목숨까지 다하여 하님을 사랑하라라는 요구는 우리에게 무언가를 내놓으라는 협박 같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가 목숨을 다하여 사랑하기에 모자라지 않는, 우리 전부를 다 걸고 사랑하여도 전혀 아깝지 않은, 아니 그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분이라는 가치판단이 전제되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이 명령은 내키지 않는 마음을 억지로 단도리 하여 사랑해요라는 말을 짜내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 전부를 다 드리고, 또 드려도 눈곱만큼도 아깝지 않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누리고 즐기라는 초대입니다. 따라서 전부를 드려 하나님을 사랑하라라는 명령이 무거운 짐으로 느껴지느냐, 아니면 즐거이 따르고자 하는 초대로 느껴지느냐 하는 차이는 그 명령을 듣는 자가 어떻게 하나님을 이해하며, 얼마나 깊이 하나님과 사귀고 있는가의 차이에서 일차적으로 발생하는 것이지, 억지로 의지를 짜내어 복종하는 여부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것은 아닙니다.

 

 

3.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께 순종하라거나, 또는 주 너의 하나님께 복종하라가 아니라,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하는 것이 가장 큰 계명으로 요구되고 있습니다. ‘순종하라또는 복종하라라는 요구와 사랑하라라는 요구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 성경은 여러 곳에서 주님께 순종하고 복종할 것을 요구합니다(30:2/27:10). 하지만 모든 계명 중 제일 큰 계명은 하나님께 순종하라거나 복종하라가 아닌 하나님을 사랑하라입니다. 순종이 권위를 가진 자의 명령에 자기 스스로도 항복하여 그 명령을 따르는 것을 뜻한다면, 복종은 권위를 가진 자의 명령에 동의하든 그렇지 않든, 이해하든 그렇지 못하든 그 명령을 따르는 것을 뜻한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랑은 단순히 권위를 가진 자의 명령을 따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반응을 낳습니다. 사랑은 명령이 주어지기 이전에 먼저 상대방을 위하여 자기 것을 기꺼이 내어줍니다. 수동적이지 않고 능동적이며, 소극적이지 않고 적극적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복종이나 순종이 아니라 사랑을 요구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훨씬 더 높은 차원의 반응을 요구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4. “사랑은 동등한 수준의 존재 사이에서만 이루어지는 가장 차원 높은 관계 방식이다.”라고 사랑을 설명할 수 있다면, 그 경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을 요구하신다는 사실이 뜻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 우리가 개를 사랑할 수는 있지만, 개에게 사랑을 요구하지는 않습니다. 개가 우리에게 충성을 바칠 수는 있지만, 개가 우리를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개가 우리의 명령을 듣고 순종할 때 우리는 나름대로 기쁨을 누릴 수 있지만, 그것이 우리 마음의 모든 필요와 요구를 다 채워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사랑만이 사람 마음의 모든 필요와 요구를 다 채워 사람을 행복하게 만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을 요구하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개와 같은 차원의 존재로 생각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자신과 대등한 차원의 존재로 생각하여 상대하신다는 것을 뜻합니다.  

 

[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4]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15:13-15)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이 없는데, 주께서는 그의 제자들을 친구라 부르시며 그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십니다. 종은 주인의 명령만을 따를 뿐이지만, 친구는 상대방이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를 알아서, 그를 위해 목숨까지 버립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할 뿐 아니라, 우리가 그와 대등한 존재로서 자신을 사랑할 것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5.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의 축복을 얻기 위해서? 그를 섬기지 않으면 화가 있을 것이라는 두려움에서? 아니면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

 

 

->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면 분명 우리는 그의 축복을 누리며 살 수 있을 것입니다.(28:2)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이유가 오직 그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일 뿐이라면, 하나님은 사랑의 대상이 아닌, 이용의 대상이 되고, 그 때 하나님은 참된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의 소원을 이루어주는 우상이 될 뿐입니다. 만일 우리가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의 요구를 따르는 것이라면 우리는 두려움 속에서 최후를 맞았던 사울 왕과 같이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지 못한 채 비참한 결말을 맞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목적 자체로 대하시며, 우리를 자신과 동등한 존재로 대하시며,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두려움이나 거래가 아닌, 된 사랑을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