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2월 18일 주일예배 설교

 

제목 : 마태(33) -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를 따른다는 것

 

설교 : 홍성일 목사

 

본문 : 마태복음 8장 18절~22절

 

* 설교 녹음이 되지 않아, 설교 원고를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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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33) -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를 따른다는 것 (마태 8 18-22)

2011-12-18 주일예배 설교

 

( 8:18-22) [18] 예수께서 무리가 자기를 에워싸는 것을 보시고 건너편으로 가기를 명하시니라 [19]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아뢰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20]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21] 제자 중에 또 한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

 

유명한 무리-제자의 구분 속에서, 마태는 제자란 어떤 자이며 어떤 자세를 가지고 예수를 따라야 하는지를 복음서 전체를 통해 잘 보여줍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 마태의 강조는 제자들이 가져야 할 각오나 자세에 놓여 있지 않고, 제자들이 따라야 할 예수 자신의 자세나 각오에 놓여 있습니다.  

 

8-9장의 10가지 기적 이야기에서 우리는 믿음의 사람을 만나기도 하고, 사람들의 반응을 보기도 하지만, 그러나 8-9장의 기적을 통해 마태가 보여주고 싶은 것은, 예수 그 자신입니다.

 

( 9:35-38) [35] 예수께서….  [36]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37]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38]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무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 그들의 고생과 기진함을 알고 계시며, 그로 인해 마음이 움직이고, 몸이 움직이고, 삶이 움직이는 예수, 추수할 일꾼을 자청하신 예수를 우리는 기적의 책에서 만나게 됩니다.

 

여기 8장의 제자도에 대한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라는 서기관의 물음과 그에 대한 예수의 대답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는 말씀은 제자들도 그러한 삶을 각오해야 한다는 각성의 요구에 앞서, 머리 둘 곳도 없는 삶을 살고 계시는 예수님 자신을 보여준다는데 그 일차적 목표가 있습니다.

 

본문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예수의 제자로 예수를 따른다는 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말씀부터 시작해 보도록 합시다.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예수를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 자신이 먼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셨다는 사실이 전제됩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자기 부정이란 어떤 것이겠습니까?

 

이 말의 의미를 알게 해주는 것이 베드로의 예수님에 대한 부인과 회복에 대한 기사 입니다.

모든 복음서가 이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요한복음은 베드로를 찾아가 그를 회복해주신 예수님에 대한 기사로 끝이 납니다. 이 만남에 근거하여 교회가 생겨납니다. 저는 이 사건 안에 복음의 정수가 담겨있다고 생각합니다.

 

( 26: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 26:35 『베드로가 이르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그와 같이 말하니라』

 

( 26:70)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노라 하며』

( 26:72)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 26:75)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를 따라야 하는데, 다 부인해도 나는 부인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베드로는 여기서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 예수를 부인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살기 위해, 자기의 고민 속에서 예수를 부인합니다.

 

절망과 당황스러움 속에서 번민하면서 베드로는 결국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부인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베드로를 부인하지 않고, 그런 베드로를 모른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는 베드로를 긍정하러 찾아 오십니다. 부활 후 그를 만나 주십니다.  

베드로를 긍정하기 위해, 그를 안다고 말하기 위해, 그는 자기를 부인합니다. 십자가를 지십니다.  

 

<나는 너를 사랑하는데, 너는 그것을 아느냐?>

베드로를 회복시켜 다시 사도로 새우기 위해 예수님은

자신을 부인한 베드로에게 찾아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셨던 것입니다.

 

도망갈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도, 예수는 그들을 긍정하기 위해 자기를 부정하시는 자리에 서십니다.

정죄되어 마땅할 수 있는 그들이, 스스로 정죄감을 갖지 않도록 하기 위해, 예수는 그들의 발을 씻기십니다.

 

이것이 자기 부인입니다.

자기 욕망을 부인하는 것, 자기를 무화 시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상대방을 긍정하기 위해, 자기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8장 본문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자기 부인의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서기관의 질문에 예수는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고, 집도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마태에서 예수는 여기서 처음으로 인자라는 자기칭호를 사용하십니다.

 

인자란 사람의 아들이란 뜻입니다.

보통은 다니엘 7장의 인자를 가리킨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런 부분이 있습니다. 인자는 하늘에서 심판주로 오시는 분으로 자주 복음서에 나타납니다. 그러나 인자는 또한 사람의 아들로 오신 예수님의 자기 부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문맥에서도 자주 사용됩니다.

 

( 20:18-19) [18]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19]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서기관의 질문에, ‚인자라는 자기 칭호를 사용하시면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자기를 부인하고, 인자 곧 사람의 아들로서 이 땅에 오신 당신을 소개합니다.

하늘 영광도, 하늘 집도 버립니다.

사람을 긍정하시기 위해, 사람을 부정하지 않기 위해, 그들을 받으시고 용납하시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자기를 부인하시는 것입니다.

 

본문의 말씀은 그래서 여기에 등장합니다.

이 말씀 이후 예수는 풍랑 이는 바다를 건너 가다라 지방으로 가서 무덤 가운데 죽은 자와 방불한 자 둘을 고치시고, 다시 가버나움으로 돌아와 중풍병자를 용서하시며 치유하십니다.

그 여정을 시작하면서, 이 여정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확인시키기 위해, 마태는 여기 예수님의 이 대화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긍정하기 위해, 자기를 부정하고 마침내 십자가를 지시는 예수, 인자, 사람의 아들.

 

그 길이 우리가 따라가야 할 길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 이십니다.

그 하나님은 자기가 만든 이 세상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오히려 하나님을 부정하고, 부인합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정의를 부정하고,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세상은 자기만을 긍정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세상일지라도, 자신이 지으신 그 세계를 부정하지 않고, 긍정합니다.

세상을 인정하고 긍정하기 위해 하나님은 오히려 자기 자신을 부정하시고, 자기 아들 예수를 십자가의 제물로 내어 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세상을 향한 이처럼의 사랑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 다른 사람을 부인하지 아니하고, 그들을 부정하다 정죄하지 아니하고, 그들을 믿을 수 없다 판단하지 아니하고, 그들을 나쁜 사람들이다 심판하지 아니하고,

- 그들의 연약함과 어리석음과 부족함을 오히려 불쌍히 여기어, 그 삶의 자리에 참여하러 오신 예수님의 길을 따라 걸어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사람이 되었을 뿐 아니라 죽음의 자리까지 우리를 따라 들어오십니다.

그들의 연약함을 체험하시고, 그리고는 그들을 받아 주십니다. 사랑입니다.

 

자기 부인은 사랑에서 나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상대방을 부인해 버리지 않고 오히려 자기를 부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유명한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은 모두 상대방을 긍정하기 위해 자기를 부인하는 사랑입니다.

 

상대방을 부인하고 지워 버리는 것으로 내가 살지 않습니다.

상대방을 부인하고 지워 버리면 나 또한 지워집니다. 거기엔 사랑도, 행복도, 만족도 없습니다.

 

내가 나 자신을 부정할 때, 그리고 상대방을 긍정할 때, 인정하고 믿어 줄 때, 그 때 나 또한 긍정될 수 있습니다.

 

자기 부인은, 자기 고행이나 금욕이 아니라, 사람에 대한 긍정, 세상에 대한 긍정, 인생에 대한 긍정입니다.

그것을 위해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것! 그것이 예수님의 길이었고, 그를 따르는 제자들이 마땅히 걸어 가야 할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