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2월 11일 주일예배 설교

 

제목 : 마태(32) - 이러한 믿음

 

설교 : 홍성일 목사

 

본문 : 마태복음 8장 5절~13절



*. 설교 후반부 녹음이 이루어 지지 않아 설교 원고를 올립니다.

 

 

 

마태(32) - 이러한 믿음 (8:5-13)

2011-12-11 주일예배 설교

오늘 본문은, 산상수훈을 마치고 이어지는 8-9장의 10가지 기적 중 첫 번째 세트에 속하는 백부장의 종을 치유하신 사건에 대한 기사입니다.

 

누가복음은 평지강화 바로 다음에 이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마태나 누가 모두, 이 백부장의 믿음에서 산상수훈 또는 평지강화를 들은 사람들이 마땅히 보이게 될 반응의 전형을 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반응이란 믿음입니다.

 

마태는 생각보다 자주, 믿음을 언급합니다. 복음서 전체에서 25번 언급됩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서 믿음에 대한 첫 번째 언급이 바로 본문 백부장 기사에서 나타납니다.

 

물론 마6:30절에 들풀도 입히시는데,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에서 처음으로 믿음이라는 말이 나타나지만, 누군가의 믿음에 대한 묘사로는 여기가 처음입니다. 처음이면서 큰 믿음, 예수를 놀라게 하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이 백부장의 믿음은, 말 그대로 믿음의 전형이 됩니다. ‚마태가 추구하고 지향하는 믿음이란 이런 믿음이다이렇게 얘기할 수 있는 믿음입니다.

 

그 믿음을 잘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작은 믿음에 대한 말씀을 잠시 살피려 합니다.

 

작은 믿음에 대한 언급은 마태복음에 4번 나옵니다. (6:30; 8:26; 14:31; 16:8)

 

그 중, 두 가지. -  들풀을 보고 믿음을 논하는 6 30절 말씀과 8장의 바다를 잠잠케 하시며 믿음을 언급하시는 말씀이, 우리 본문을 감싸고 있습니다. , 작은 믿음에 대한 두 가지 말씀 사이에, ‚큰 믿음‘, ‚이러한 믿음‘, ‚놀라운 믿음에 대한 기사가 놓여 있는 것입니다.

 

그럼 적은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 8:23-27) [23] 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따랐더니 [24] 바다에 큰 놀(큰 물결)이 일어나 배가 물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께서는 주무시는지라(auvto.j de. evka,qeudenÅ) [25]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이르되 주여 구원하소서(sw/son) 우리가 죽겠나이다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ti, deiloi, evste /너희가 겁쟁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evge,neto galh,nh mega,lh) [27] 그 사람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더라』

 

바다에 물결이 일어, 배를 덮쳐 죽을 상황이 되었는데, 너희는 왜 이렇게 겁이 많으냐? 어찌 믿음이 이렇게도 작으냐? 하십니다.

 

예수는 지금 가버나움 사역을 멈추고, 갑자기, 이방 땅 가다라 지방으로 가서, 귀신들린 자 둘을 온전케 하고, 그리고는 다시 가버나움으로 돌아오는 여정을 시작하십니다. 목적이 있는 여행입니다. 그 중간에 큰 바람이 일어납니다.

 

제자들 중 많은 이들이 어부들이었습니다. 처음엔 어 바람 좀, 부는데!“ 했을 것입니다.

서로 이정도 쯤이야, 내가 7살 때, 다 겪었지하며 농담도 했을 법합니다.

그런데 바람이 도를 넘어 섭니다. 직감합니다. ‚이거 장난이 아니다.‘ - ‚내 기술과 능력으로 통제할 수 있는 바람이 아니다.‘ 그러자 갑자기 두려움이 덮칩니다. 그리고 울부짖기 시작합니다. „주여! 구원하소서!“ 

아마 예수를 부르는 소리였겠지만, 예수님이 배에 없었다면, 그들은 그 외침으로 하나님을 불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부름에 답해줄, 하나님 자신이 지금, 그 풍랑에 떠밀리는 배에, 그들과 함께 타고 계십니다.

 

천지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저기 하늘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기 그들의 배에, 그들과 함께 계십니다.

 

예수님이 일어나 말합니다. „왜 겁을 내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천지를 지으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 이십니다. 그는 우리 사정과 형편을 아십니다. 폭풍우 이는 현장에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부르짖어야만 우리 소리가 들려지고, 우리 사정이 알려지는 저 높은 곳에서 우리를 관망하며 계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예수는 지금 이 풍랑을 뚫고 가다라로 가서, 광인 둘을 만나, 그들을 온전케 하고 돌아올 것입니다. 그 사이에 이는 광풍이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그 일을 다 이루기까지 배는 파선하지 않을 것입니다.

 

풍랑이 이는 바다, 그 흔들리는 배 한가운데, 하나님은 그들 곁에 계십니다.  

배가 표류하고 마침내 배가 깨어져 파선 할 때조차 주님은 로마로 가던 바울 곁에 계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빠는, 항상 우리 곁에 계십니다.

 

그가 내 곁에 없어서, 광풍이 이는 것이 아니며, 그가 내 곁에 없어서 경각의 위험이 내게 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입히시는 우리 아빠입니다.

 

우리는 우리 삶의 길을 다 가기까지, 우리 항해를 다 마칠 때까지, 성급하게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일 비록 아궁이에 던져지는 땔감이 될 지라도, 하나님은 오늘 나를 아름답게 입히십니다.

솔로몬의 입은 옷을 다 합친 것 보다 더한 영광으로 오늘 내 삶을 풍성하게 하십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작은 믿음은 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작은 믿음은 자연과 천지를 운행하시는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다라는 사실을 생각하지 못한 데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나 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큰 믿음입니다.

 

우리는 이 믿음을 백부장에게서 만납니다.

 

먼저 본문의 배치를 봐야 합니다.

 

8-9장의 열 번의 기적 중, 예수님은 5번 사람들을 만지시며 그들을 고치십니다.

그가 만져 주었던 사람들은 다 치유 만큼이나, 누군가의 만져짐이 필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말씀으로만 하셔도 백부장의 종의 병을 고치시고, 말씀만으로 바다를 잠잠케 하시며, 말씀만으로 광포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중풍병자의 죄를 말씀만으로 용서하시고, 말씀만으로 귀신들려 말 못하던 자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시는 권세 있는 예수께서,    깨끗케 되어지고, 치유가 필요할 뿐 아니라, 누군가의 만져짐과 사랑이 진정으로 필요한 사람들을 찾아가, 만져 주심으로 그들을 고치십니다.

 

그 대표인 문둥병자와 베드로의 장모를 만져주시는 예수님을 소개하고서, 그 사이에 말씀으로만 하십시오. 그러면 낳겠습니다.“ 하는 이 백부장의 믿음이 등장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백부장의 이 믿음을 보시고, 놀라십니다.

그 동안은 사람들이 예수님으로 인해 놀랐습니다. 권세 있는 가르침에 무리가 놀라고, 나병환자를 만지시는 것에 무리 뿐 아니라 나병환자 자신 또한 놀라고, 예수님의 세심한 관심과 알아주심에 베드로의 장모가 놀랐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예수님이 백부장의 믿음에 놀랍니다.

 

무엇이 예수를 놀라게 하는 이러한 믿음일까요?

 

그것은 권위에 대한 이해와 인정, 그리고 그 권위에 복종하는 믿음이었습니다.

 

9절입니다.

( 8:9)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라는 말은 본래 나는 권세 아래에 있는 사람입니다.‘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백부장의 믿음의 고백은명령만으로, 말만으로도 고쳐질 줄 믿습니다. 굳이 오셔서 만져주지 않아도 됩니다는 것에 본질이 있는 것이 아니라, 권세에 대한 인정에 그 본질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백부장의 말은 지금 이런 뜻입니다.

 

나는 누군가의 권세 아래에 있는 사람입니다. 나에겐 상관이 있습니다. 내 아래에도 부하가 있습니다. 내가 명하면 그가 명대로 모든 것을 행합니다. 나 또한 권세 아래에 있어서, 상관이 명하면 나는 그대로 다 행합니다.“

 

당신은 주님이십니다.

천지 만물과 천하 만인의 주인이십니다.

당신이 명하면 그대로 되어지지 않을 것이 없고, 당신이 명한다면 순종하지 않을 것이 없습니다.

당신은 나의 주인이시고, 천지의 주인이십니다.

그러니 당신이 말씀하시면, 천지가 순종할 것입니다. 나 또한 순종하고 따를 것입니다.„

 

당신이 명하시면, 이루어지고, 당신이 명하시면 순종합니다.“라는 말이 그의 믿음의 중심 내용입니다. 

 

이러한 백부장의 믿음은 어떻게 생겨났을까요?

자기 종이 질병으로 고통하는 상황 속에서,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 같은 자리에 있으면서, 풍랑이 이는 바다에서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백부장의 그 믿음의 고백, „당신이 명하시면, 천지가 순종하고, 나 또한 순종합니다.“라는 믿음의 고백은 어떻게 생겨났을까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의 고백과 지금 고통하고 아파하는 백부장의 종의 아픔 사이에는 깊은 틈과 간격이 있지 않습니까?

천지가 순종하는 주님에 대한 고백과 지금 풍랑에 떠밀려 죽을 것 같은 상황에 처한 제자들의 배에 타셔서 함께 흔들리고 계신 예수님 사이에는 깊은 틈과 간격이 있지 않습니까?

 

그 간격을 메우는 것은 백부장의 믿음의 고백의 요체인 권위에 대한 인정입니다.

 

권위란 무엇입니까?

이해할 수 없어도, 그가 말하면 그것은 따를만하다.

이해할 수 없어도, 그가 말하면 그것은 이루어진다.

이해할 수 없어도, 그가 말하면, 그것은 분명 옳은 것이다.

 지금 이해할 수 없어도, 그는 항상 우리 행복을 바라는 분이시다. 이 모든 시간을 지나고 나면, 마침내 내게 복을 주실 것이다.‘ 라는 반응을 낳게 하는 힘, 그것이 권위 입니다.

 

욥기에서 욥이 스스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로 인하여 하나님께 호소하고, 자기의 억울함을 호소합니다.

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인 욥기 38~40장은 한마디로 나는 창조주다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대답은 권위였습니다.

 

이러한 권위에 대한 인정은 그런데 어떻게 생겨납니까?

하나님께서 창조주로서 행해오신 일들, 그의 지혜, 능력, 사랑 등등을 묵상하고 알게 되는 가운데 생겨납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를 만난 자들은, 누구나 예수의 권위를 인정하게 됩니다.

자기를 만져주신 예수를 만난 문둥병자의 마음을 따라가 볼 수 있으시겠습니까?

 

그는 나를 만지러 이곳까지 오신 하나님이다. 그는 내 고통을 아신다.

비록 내가 문둥병에 걸려 오랜 세월을 고통 가운데 살았지만, 때로 이해할 수 없어 하나님을 원망하고, 인생을 저주하기도 했지만, 하지만 오늘 나를 찾아와 나를 만져주신 예수님의 손길에서 나는 나를 향한 그분의 무한한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니 이해할 수 없었던 그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분께 감사하며, 그분을 찬양한다.

이제 후로는, 비록 내가 다시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의 상황에 이끌려 들지라도, 나는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믿고 그분을 사랑하며, 신뢰한다. 비록 천하 만민이 그분을 듣지 않을 지라도, 나는 그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며 감사할 것이다.“

 

그분과의 만남이 그분에 대한 믿음을 낳고, 그 믿음이 그분의 권위에 대한 인정을 낳고, 권위에 대한 인정이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 중에서도 그의 명령을 따라 살아가는 순종을 낳게 되는 것입니다.

 

( 8:9)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여기가 믿음의 자리입니다. 예수를 만난 자가 마땅히 보여야 할 반응의 내용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러 오신 분이라는 사실을 아는 자는

자신의 고통이라는 현실과 주님의 사랑이라는 그 간격을 살아내면서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감사하며, 순종할 수 있습니다.

 

환경과 상황과 조건이 다른 말을 한다면,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을 보고, 오늘 그것을 아름답게 입히시는 하나님 아빠를 생각해야 합니다.

풍랑의 상황에서 우리 배에 함께 타고 우리와 함께 흔들리고 계시는 예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십자가의 예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시러 오신 나의 주님 앞에서,

풍랑의 바다를 건너, 모든 사람에게 버려져 무덤에 거처를 정하고 사는, 죽은 자와 방불한, 이방 땅의 버려진 사람 둘을 만나러 가시는 예수님 앞에서,

병든 몸 보다, 죄 사함의 선언이 더욱 절실했을 한 중풍 병자에게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말씀하시며 그의 마음을 만져 주시는 예수님 앞에서

우리가 마땅히 보여야 할 반응은, „주님 말씀하십시오.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며, 이것을 하라 하면 하겠습니다.“

이것 말고 다른 어떤 것일 수 없는 것입니다.

 

백부장의 고백에 담긴 이 큰 믿음을 가지고, 간극 있는 이 땅에서의 삶을 믿음으로 살아가셔서, 주님을 놀라게 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