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하 24 - 요아스 : 왕이 되고자 길을 잃다 (대하 24:1-27)

 


대제사장 여호야다의 혁명을 통해 7살의 나이에 왕위에 오른 요아스는 40년을 다스리나(1) 47세의 나이에 반역자들에 의해 침상에서 죽임을 당하고 만다(25). 왕궁 ‘말의 문‘ 어귀에서 죽임을 당한 아달랴의 말로와 전혀 다를 바 없어 보이는 죽음을 여호야다 밑에서 자라난 요아스 또한 겪고 만다(23:15; 24:25). 이 어찌된 일인가?


역대기 기자는 요아스가 대제사장 여호야다의 사는 날 동안 여호와 앞에서 정직히 행했으나(2), 여호야다 사후 유다 방백들에 의해 잘못된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고 기록한다(17). 130세를 향수하고 죽은 여호야다가 요아스 치세 몇 년에 죽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열왕기에 따르면 둘 사이의 간극은 수 년여를 통해 차츰 벌어져 오다 요아스 통치 23년에 그 분기점을 맞게 된다(왕하12:6). 


요아스와 제사장 및 레위인 계층은 표면적으로는 성전 건축 재원 마련과 관련하여 서로 충돌하게 된다(cf.왕하12:6,7; 대하24:5). 결국 마련된 해결책은 일종의 타협안이다. 요아스는 모세가 광야에서 성막을 위하여 정한 세인 반세겔을 매해 거둘 것을 요구하지만(6; 출30:11-16) 성전 보수를 위해 요구되는 재원은 반세겔의 세금 형식이 아닌 백성들의 자발적인 연보로 충당된다(8). 일종의 타협안이다. 


7살에 왕위에 올랐으니 요아스가 20대가 되기까지 최소13년은 국정에 있어 대제사장 여호야다의 영향력이 상당했을 것임은 불문가지다. 더욱이 여호야다의 며느리 여호사브앗은 요아스의 생명의 은인이며, 여호야다 자신 혁명을 통해 아달랴를 죽이고 일찍이 요아스를 왕으로 세운 자이니 여러 면에 있어 여호야다는 요아스의 은인 중의 은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영향력이 요아스에겐 버거운 짐이었을까?


요아스는 언제부턴가 성전 보수를 위한 재원 마련을 대제사장 여호야다와 레위인 계급에게 요구하나, 제사장 계층은 그에 소극적인 반응을 보였다(4). 수면 아래 가라 앉아 있던 갈등이 요아스 통치 23년, 요아스가 30세가 되는 때에 수면 위로 부상한다. 


요아스가 국정의 주도권을 요구할 수 있을 어느 때인가 요아스는 아무도 거절할 수 없는 명분인 성전 보수라는 카드로 제사장 집단의 경제권과 민감한 연관이 있는 반세겔 세금을 대대적으로 걷고자 한다(5). 그간 제사장/레위인들이 직접 사람들에게 다양한 루트로 제의를 위한 비용과 레위인들의 생계와 관련된 재정을 마련해왔던 것에 대해(cf.왕하12:5) 요아스는 성전 보수의 명분 하에 재정의 수급을 왕인 자신의 주도하에 두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자 제사장 계층과 레위인들은 이에 선뜻 따르지 못했고(cf.왕하12:6;대하24:5), 따라서 요아스의 정치력이 약했던 기간 동안 요아스의 요구는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요아스의 나이 30살, 그의 통치 23년 경, 요아스 자신에 의해 일종의 타협안에 제시된다(8). 국가 주도의 세금이 아닌 일종의 자발적인 헌물을 받고(10), 그 금액으로 성전을 보수하고, 그 후 남은 금액으로 여호와의 전의 기구들을 제작하는 것이다(14). 제사장들 또한 이에 동의하고, 백성들 또한 기뻐하여 자발적인 헌물이 이루어지고(10,11), 그 결과 성전의 보수가 이루어진다. 이 과정에서 요아스 왕은 여호야다와 최소한 동등한 정도의 국정 주도권을 확보하게 된다(12).


그리고 여호야다가 죽는다(15). 성전 보수에 들어간 시간을 계산해본다면, 요아스는 빠르면 통치 25년 경부터 여호야다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운 상태에서 국정을 운영해가게 된다. 그 때 그는 자신의 국정 파트너로 더 이상 제사장이나 레위인 계급이 아닌 유다 방백들을 선택한다(17). 요아스 자신은 왕권의 강화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 생각할 수도 있었으리라. 그러나 국정에서 제사장 계급을 제외하는 과정에서 요아스는 돌이킬 수 없는 잘못된 길을 간다. 그토록 오랜 시절 성전의 보수를 위해 노력했던 요아스가 여호아의 성전을 버린다(18). 그 자리에 아세라 목상과 우상이 들어선다(18). 


대 제사장 여호야다 밑에서 자라난 요아스 통치 후기의 모습에서 우리는 여호야다 자신의 반면을 볼 수 있을까? 그렇지는 않아 보인다.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는 변심한 요아스를 성전 안에서 꾸짖는다(20). 요아스는 스가랴를 성전 안에서 돌로 쳐서 죽도록 명한다(21). 제사장 계급의 이익에서 여호야다가 완전히 자유로웠다고 할 수 없을지는 모르겠지만 여호야다는 이스라엘과 하나님과 성전에 대해 선을 행하다 130년의 삶을 마치고 다윗 성 왕의 묘실에 안치된다(16). 그러나 정작 요아스 왕은 왕의 묘실에 묻히지 못한다(25). 


7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강력했던 제사장 계급에게서 국정의 주도권을 가져와 유다의 ‘왕‘으로서 실권을 행사하고 싶었을 요아스는 그 열망 가운데서 ‘은혜‘에 대한 감각을 잃고는 길을 잃는다(22). 


유다의 진정한 왕이 되기 위해서 요아스에게 필요했던 것은 왕권 강화를 위해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을 무수한 전략들이 아니라, 모든 형제들이 죽어가는 피비린내 나는 살육 가운데서 자신을 살려 유다의 왕으로 세우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에 대한 감사를 아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 마음의 자리에 서서 사는 것이 ‘정직‘이다. 


어린 요아스를 왕으로 세운 여호야다는 왕의 묘실에 묻히고(1,16), 제사장 세력을 밟으며 왕권 강화의 길을 가고자 여호와의 성전을 이용하다 버렸던 요아스는 그곳에 묻히지 못한다(18,25). 죽어 결국 왕의 묘실에 묻히지 못했던 요아스의 인생을 돌아보며, 내가 집중해야할 단하나의 왕권이 무엇인지를 잊지 말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