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32 - 위로부터 영이 우리 위에 부어지기까지 (32:1-20)

 

(체데크)로 통치할 한 왕은 요시야일까?(1) 정의(미슈파트)로 다스리는 방백들은 요시야의 방백들일까?(1) 32장은 분명 요시야 시대를 배경으로 말해지는 것으로 보인다. 640~609, 31년간 유다는 요시야의 통치 가운데 안정과 번영을 구가한다. 그러나 8세에 등극했던(대하 34:1) 요시야가 나름의 정치적 비전과 소신을 가지고 본격적으로 나라를 다스리기 시작한 것은 성전에서 모세의 두리마리가 발견되던 해, 곧 그가 왕이 된지 18년째(622, 26)되던 해 이후부터였을 것이다(대하 34:8). 그 후 13년간 요시야는 성전에서 발견된 모세의 율법 책을 중심에 두고 백성을 다스렸다(대하34:14).

 

모세의 율법책이 명하는 하나님의 백성의 길은 공평(미슈파트)과 의로움(체데크/체다카)이다(1). 요시야는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백성들을 불러모아 모세의 율법책을 들려 주었고(대하34:30),   말씀을 들은 백성들은 요시야가 사는 날 동안 하나님을 섬기며 살았다고 한다(대하34:33). 듣는 자들이 귀를 기울여 들음으로 그들의 귀가 열리고 눈이 열렸다(2-3). 조급히 애굽을 의지하며 정책을 피던 자들이 지식을 깨달을 수도 있었으리라(4). 요시야가 친애굽 정책에서 돌아서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이때 이후였을 것이다.

 

요시야의 통치는 한편 안정과 번영을 가져다 주었지만, 그러나 그 안정과 번영은 칼자루 없는 칼처럼 그 잡은 자를 해치는 것이 될 수도 있었다(9). 30년간 지속된 안정과 여유는 안일을 낳았고(9), 안일은 하나님의 목소리에 대한 무감각을 낳았다(cf.9). 말씀을 듣고 열렸던 귀가, 그로 인해 누려진 번영으로 인해 다시 닫히게 되는 일은 그들만의 경험만은 아닐 것이다.

 

참된 평화와 안전은 부유함과 풍성함에서 비롯되지 않고, 오직 의(체다카)에서 비롯된다(17). 평화를 뜻하는 샬롬은 본래 모든 것이 꽉 채워진 상태를 뜻한다. 이러한 꽉 채워짐은 그러나 다른 한편의 비움을 전제한다(cf.16). 요시야 사후 안일로 뒤척이던 땅은 광야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 광야야말로 공평의 거처가 될 것이며, 성곽이 아닌 밭이야 말로 의의 거처가 될 것이다(16).

 

채워짐은 상실을 전제로 한다. 잃어버린 자만이 충만을 충만으로 알아차린다. 그러나 상실 그 자체가 곧 충만함으로 가는 길은 아니다. 반복되는 상실과 도로 찾음의 경험 속에서도 이스라엘은 하나님 안에서 충만함을 누리는 대신, 다시 찾은 풍요 속에서 안일에 빠지기를 반복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마침내 위에서부터 우리 위에 영을 부어주실 때, 광야는 밭이 되고, 밭은 다시 숲이 될 것이다(15).

 

이곳 저곳 황폐함이 가득한 우리들임에도 베로 허리를 동이기는커녕(11) 어리석음과(6) 악한 계획에 빠져(7) 다시 채워짐 없는 파멸에 이르지 않기를 바라고 또 바랄 뿐이다. “보라 장차 한 왕이 의로 통치할 것이라(1). 마침내 위에서부터 영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리라.“(15) “주여, 이제부터 나의 소망은 오직 주께 있나이다.“(3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