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 하나님 ( 31:1-9)

 

이사야는 30장에 이어 31장에서도 또다시 앗수르의 넘어짐을 예언한다. 그러나 이사야의 예언이 향하는 방향은 앗수르의 넘어짐에 대한 것이 아닌 애굽을 의지하는 유다의 행보에 대한 것이다(1). 유다는 앗수르 세력 약화를 전망하며 애굽에 줄을 대었다(1). 그러나 애굽은 605년 갈그미스 전투에서 바벨론에 패한 뒤 팔래스틴 이북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한다(왕하34:7).

 

요시야의 유다는(640-609) 반 앗수르, 친 애굽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요시야 통치 후기에 이르러 앗수르는 눈에 띄게 약화되고, 그 사이 바벨론이 세력을 얻어가면서 팔래스틴을 둘러싼 국제 정세는 급변한다. 유다가 의지하던 애굽이 유다의 주적 앗수르와 손을 잡는다. 애굽은 쇠퇴한 앗수르를 도와 강력한 세력으로 커가는 바벨론을 견제하고 근동 지역의 패권을 자신이 쥐고자 했을 것이다. 그러니 반-앗수르 정책을 펴며 애굽을 의지하던 요시야의 유다는 믿었던 애굽에 배신을 당한 셈이다.

 

요시야는 그 동안의 입장에서 돌이켜 앗수르와 더불어 바벨론를 치고자 하는 애굽의 느고에 대항하여 므깃도에서 그와 맞서 싸우지만 결국 전사하고 만다(왕하23:29). 그런데 역대기 기자는 요시야의 이러한 선택을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것으로 해석한다(대하35:22). 친 애굽도 반 애굽도 성경 기자는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것이라 해석하는 셈이니 도대체 무엇이 하나님의 뜻이란 말인가?

 

하나님의 백성이 취해야 할 정치적 입장은 세력의 판도를 읽어 내고 강한 세력에 붙는 줄타기를 통한 살아남기가 아니라(1), 하나님의 백성답게 존재하는 것이다(cf.5,9). 이스라엘이 두려워하며 살펴야 할 것은 주변 열강의 세력의 판도가 아니라 시온에 거하시는 하나님이다(3,9). 애굽이 아니라 그분 자신이 새끼를 보호하는 새처럼 자기 백성을 보호하실 것이다(5). 이스라엘이 바라보고 찾아가야 하는 대상은 손에 잡히는 권력이 아닌 하나님 자신이다(6).

 

하나님의 백성은 살아남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답게 존재하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다. 힘은 그들 외부에 놓인 크고 작은 세력들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 안에 있다(9). 시온에 불이 있고, 예루살렘에 여호와의 풀무가 있다(9). 그러니 친애굽도 반애굽도 아닌 친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취할 정치적 선택이다.

 

앗수르가 칼에 무너진다면(8) 이스라엘은 애굽이 아닌 여호와께로 돌아가야 한다. 애굽이 바벨론에 패퇴한다면 이스라엘은 바벨론이 아닌 여호와께로 돌아가야 한다. 돌아가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존재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지 않는 것도, 바벨론을 물리치는 것도 아닌, 그들이 어디에 있든 하나님의 백성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 안에 빛이 있고(9) 그들 안에 하나님께서 거하시기 때문이다.

 

605년 갈그미스 전투에서 애굽의 느고가 패하고, 그 해 느브갓네살은 예루살렘을 치고 다니엘과 그 친구들을 바벨론으로 끌고 간다(1:1). 그곳 사로잡혀간 곳에서 다니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간다. 그러자 그가 있는 곳 그곳이 시온이 되고, 그는 그곳에서 빛이 된다(cf.9; 12:3). 살아남기 위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참으로 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