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15엘리바스, 하나님 경외를 말하다. ( 15:1-35)


다시 엘리바스다. 첫번째 권고에서 엘리바스의 말에는 그래도 욥에 대한 위로와 그의 미래에 대한 소망이 있었다(5:17-27). 그러나 계속되는 욥의 이야기를 듣다못해 다시 말하기 시작하면서 엘리바스는 욥에 대해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기 때문에 재앙이 그에게 임했다고 대놓고 이야기한다(4,25,34).

 

하나님께 따져 묻고 있는 욥은 엘리바스가 보기에 하나님 경외를 그만둔 사람일 뿐이다(4). 하나님을 대적하며 교만하고 전능자를 무시하는(25) 욥에게 남은 것은 죄악과 재난 뿐이다(35).

 

엘리바스의 두 번째 말은 적나라하게 표현된 그의 첫 번째 말에 다름 아니다. 욥의 고통을 보고 그의 호소를 듣고도 엘리바스의 생각은 바뀌지 않는다.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거나 의로운 피조물은 없다(14,15). 그의 눈 앞에는 푸른 하늘도 부정하다(15). 그러니 여인에게서 난 자가 그분 앞에서 어떻게 깨끗하고 의로울 수 있겠는가?(14) 사람은 악을 저지르기를 물 마심 같이 하는 가증하고 부패한 존재일 뿐이다(16). 그러한 악인에게 남겨진 것은 일평생에 고통을 당하며(20) 재난을 잉태하고 죄악을 낳는 것이다(35). 욥에게 일어난 일이 다름 아닌 바로 그 일이다.

 

엘리바스에게 묻고 싶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그토록 부정하고 불의한 피조물을 왜 만드셨단 말인가? 부정하고 불의한 피조물을 만들고, 피조물이 불의하고 부정하다고 재앙을 내리는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 자신의 깨끗함과 의로움에 도취되어 스스로를 자랑하려는 것인가? 아니면 자신이 지은 피조물이 불의하고 부정하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그들을 심판하는 중인가? 그런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언제 자신에게 재앙이 떨어질지 몰라 두려움에 떠는 것이 하나님 경외라는 뜻인가? 아니다. 엘리바스는 길을 잘못 가고 있다.

 

의인은 없다. 하나도 없다. 성경도 그리 말한다. 사람의 생각과 계획이 어려서부터 항상 악하다(6:5;8:21). 맞다. 성경도 그리 말한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성경의 시각은 엘리바스의 마음의 자리와 다르다. 성경의 하나님은 그러한 사람에 대해 한탄하시고 마음에 근심하신다(6:6).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나, 그것이 사람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최종적인 대답은 아니다. 하나님은 사람으로 인해 다시는 온 땅을 저주하지 않을 것이다(8:21). 사람에 대한 한탄과 근심 속에서도 하나님은 다른 길을 가실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축복하고, 그들과 언약을 맺을 것이다(9:9). 왜냐하면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그의 자녀이기 때문이다(9:6).

 

사람을 부정하고 불의하다 하여 심판하는 의가 아닌, 부정하고 불의한 사람을 건져내어 구원하는 의, 그것이 하나님의 의로움이며, 거룩함이다(3:23-24).

 

맞다. 엘리바스의 말처럼 사람은 악을 저지르기를 물 마심 같이 하는 부패한 존재이다(16). 그러나 그러한 욥을 재앙으로 짓눌러 버리는 것으로 자신을 나타내지 않고 욥의 순전함과 하나님 경외를 자랑하고 신뢰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은 자신을 나타낸다(1:8;2:3). 같은 사실을 바라보는 두 가지 다른 시선. 그 차이는 어디서 비롯되는 것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