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한 재판관, 과부, 바리새인, 세리 그리고 나 (18:1-14)
 

과부는 '원한'을 풀어달라고 재판관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정의를 실현해달라'고 재판관을 찾아간다(3). 그런데 그는 재판관이란 이름과 모순되게 '불의한 재판관'으로 불린다(6). 그는 하나님조차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은 하찮게 여긴다(2,4). 그런 그에게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건 아마 '자기'일 것이다(5). 자기의 평온, 자기의 안전, 자기의 평판, 자기의 지위가 그에겐 하나님이고, 정의였을 것이다. 누군가의 피 끓는 애통과 단장의 고통보다 자기의 평온이 훨씬 더 중요한 '의롭지 않은' 그가, 아무 힘도 없는 과부의 요구를 끝끝내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은, 그녀의 요구가 너무나도 정당했기 때문이고, 그렇기에 그녀의 찾아옴을 금할 명분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없는 명분도 만들어 불의의 피해자에게 불의를 더하는 권세자들이 오히려 익숙한 시대를 사는 나에게 '불의한 재판관'은 오히려 '의로워' 보인다. 최소한 그는 사람을 하찮게 여기는 자신에 대한 감각이라도 있고, 자신이 정의나 하나님 경외가 아닌 자기애를 따라 움직인다는 자각이라도 있으니 말이다. '스스로를 의롭다고 믿고, 사람을 하찮게 여기'면서도 그러한 자신을 알아채지 못하는 바리새인보다(9), 자신의 불의함을 아는 ‘불의한 재판관‘이 오히려 ‘의‘에 가까워 보인다.

 

스스로 의롭다 믿었던 바리새인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실은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는다. 그는 개역성경처럼 '서서 따로 기도'(11)하는 것이 아니라, 서서 '자기에게 기도'한다. 그러니 그의 '기도'는 기도가 아닌 '혼잣말'이다. 그는 하나님 앞이 아닌 다른 사람 앞에 자신을 세우고는 '남다른 자신'을 자랑스러워한다(11). 그러나 하나님 앞에 자신을 세웠던 세리는 오직 그의 긍휼을 바랄 뿐 감히 얼굴을 들 수가 없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9) -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의 이유는 불의한 세상이나, 다른 누군가의 죄 때문이 아니라, 회개하지 않는 나 자신 때문이다. 착각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