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에 합당한 생활 (빌1:27-2:4)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한다'는 것은(27) 부정적으로 표현하면 '다툼'이나 '허영'으로 살아가지 않는다는 것이다(3). 비록 복음을 명분으로 내세우고, 권고나 위로나 교제나 자비를 이유로 내세운다 해도(1,2), 다툼과 허영으로 행하는 것이라면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는 것이 아니다(3).

다툼('에리테이아')은(3) 손해보지 않으려는 마음에서 생겨난다. 사람은 give and take 곧 ‘먼저 주고, 받을 수 있다면 기쁘게 받는다’는 원칙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take and give 곧 ‘받은 만큼은 돌려준다’는 원칙으로 살아간다. 자신은 누가 내게 좋은 것을 주면 나도 그에게 좋은 것을 주고, 누가 내게 나쁜 것을 주면 나도 그만큼은 돌려주며 살아 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람은 다 자기 자리 자기 입장에서만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이 준 것, 자신이 한 것에 대해서는 생각해도, 누군가에게 받은 것은 제대로 생각하지 못한다. 다른 이가 무언가를 주기 위해 기울인 수고와 마음의 노동에 대해서는 가볍게 여기면서도 자신이 쏟은 시간과 수고에 대해서는 무겁게 생각한다.

자신은 항상 받은 만큼은 돌려주며 사는데, 아니 받은 것보다는 조금 더 돌려주며 사는데, 다른 사람들은 받으면서도 받는 줄 모르고, 안다 해도 입을 닦는다는 생각에, 자신만 바보 같이 살고 있다고 여긴다. 그러니 늘 피해의식과 원망에 마음이 사로잡힌다. 그러면서 이번만큼은 손해보지 않겠다는 각오를 다지지만 결국 손해 보는 것은 언제나 자기라는 억울함을 마음에 품고 살아간다. 다툼은 항상 손해보고 살고 있다는, 그래서 이번만큼은 내 몫을 챙겨야겠다는, 마음에서 생겨난다(3).

바울은 성도들을 권면하면서 각자 자기 자신의 일들을 돌아볼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일들 또한 돌아보라고 말한다(4). 여기서 돌아보라(‘스코페오’)는 말은 ‘잘 살핀다’는 말이다. 자기 자리에서 자기 주위만을 살필 뿐 아니라, 상대방의 자리에서 상대방의 주위 또한 살펴보라는 말이다. 그러면 자신이 준 것보다 받은 것이 많음을 알게 될 것이고, 억울한 마음보다 감사한 마음이 들게 될 것이며, 상대방을 나 보다 낫게 여기는 마음의 자리에 설 수 있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3).

‘받은 만큼은 반드시 돌려준다, 절대 빚지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을 원칙으로 살아 왔다는 사람은 ‘예수의 복음’ 앞에 서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아는 자는 '갚을 길 없는 은혜' 앞에 서기 때문이다(29). 복음의 은혜 앞에 설 때 ‘받은 만큼은 반드시 돌려주고 살아왔다’는 자랑은 자신의 삶을 처음부터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한 순간도 설명할 수 없는 착각이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여기서 겸손이 나오고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마음의 자리가 생겨난다(3).

복음에 합당하지 않은 삶에 대한 또 다른 표현은 '허영'이다(3). 허영이 무엇인지 잘 보여주는 그림이 있다. 자신이 크다는 것을 자랑으로 삼던 엄마 개구리가 황소만큼 큰 모습으로 자신을 부풀리다 그만 배가 터져 죽는 이야기다. 허영에 해당하는 헬라어 ‘케노독사’는 ‘속 빈 영광’이란 뜻이다. 자기를 '비워(‘케노오’)' 영광에 이르렀던 예수님과 달리(7) 허영의 사람은 자기를 부풀려 영광을 얻고자 하지만, 결국은 속 빈 자신의 실상을 마주하게 될 뿐이다. 속에 진짜가 없으니 비울 것이 없고, 비울 것이 없으니 부풀리는 길로 나아가나, 그 안에 내용이 없으니 다툼의 자리에 서는 것 말고는 다른 길이 없는 것이다.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영광이란 다만 ‘속 빈 영광’ 뿐임을 확인하는 자는 자신을 부풀리는 다툼과 허영의 자리에서 내려오게 되고, 주 예수 안에서 허락된 영광 안에서 서로를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복음에 합당한 삶은 그 이후에야 비로소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