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9장 – 말 못하고 못 듣는 귀신 (막 9:14-29)


“선생님 ‘말 못하게 귀신들린’ 내 아들을 데려왔나이다.”(17) - 아이의 아버지가 아들에 대해 설명하는 첫 번째 묘사는 ‘말 못하게 귀신들린 내 아들’이다. 이 아들은 ‘귀신이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고, 이를 갈고, 파리해지곤’ 했으며(18) 또한 ‘불에도 물에도 엎어지고 넘어지곤’ 했다(22). 그럼에도 이 아버지는 아들을 ‘말 못하게 귀신들린 아들’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귀신 들린 자들에게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모습이 있다. 말을 빼앗기는 것이다. 성령이 오셔서 하신 첫 번째 사역이 각 족속의 말들로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는 것, 곧 사람으로 말하게 하는 것이었다면, 귀신은 사람에게서 말을 빼앗아 ‘말하지 못하게’ 한다.


이 아이는 어려서부터 귀신 들려 말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21). 아이는 왜 말하지 못하게 되었을까? 예수는 귀신을 꾸짖으며 “말 못하고 ‘못 듣는’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25)고 하신다. 아이가 말하지 못하게 된 이유는 그가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듣지 못했다는 말은 다만 청각에 이상이 생겼다는 말이 아니라 아이가 반드시 듣고 살았어야 할 말을 듣고 자라지 못했다는 말일 것이다.


사람이 말을 빼앗기는 이유는 그에게 바르게 말 걸어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마땅히 들어야 할 말을 듣지 못하니 자기 안에 말이 없고, 말이 없으니 말을 빼앗기고 마는 것이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고 한다(롬10:17). 마음 안에 들끓지만 차마 말하지 못하던 말들을 다 토해낸다고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복된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을 때, 비로소 ‘말 다운 말’을 품게 되고, 말 다운 말을 품을 때 비로소 그도 '말'하게 되며, 그 말을 듣는 자 또한 말하게 될 것이다.


제자들이 묻는다.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28) - 예수께서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마음에 품어 그에게 나아가 말하는) '기도' 외에는 이런 종류의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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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큰 자와 작은 자 ( 9:33-50)


누가 더 크고 강한 자인가를 논쟁했던 제자들에게(34) 예수님은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는 사람이 크고 강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신다(37). 제일 앞이 아닌 제일 뒤에 서서 제일 뒤에 있는 작은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큰 사람이라는 것이다(35).


그렇다면 제일 뒤에 서 있는 작은 사람은 누가인가? 얼마든지 실족할 수 있는 작은 사람은 다른 누군가가 아닌 바로 나 자신이다(43,45,47). 사람들은 힘이 있으면 실족하지 않을 것이라 착각하지만 그러나 힘이 있는 자는 그 힘 때문에 실족하고, 강한 자는 그 강함 때문에 실족한다. 강하든 약하든 사람은 언제든지 실족한다.


무엇이 사람을 실족하게 하는가? 사람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은('스칸달론') 다른 어떤 것이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이다(43,45,47). “네 손이 너를 실족하게 하거든... 네 발이 너를 실족하게 하거든....네 눈이 너를 실족하게 하거든...“이지, '누군가가 너를 실족하게 하거든'이 아니다.


언제든지 실족할 수 있는 소자들인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우리는 영생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cf.43,45,47).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큰 자인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었다. 그러니 소자들인 우리에게 앞이 어디 있으며, 뒤가 어디 있겠는가? 먼저 된 자가 어디 있으며, 나중 된 자가 어디 있겠는가? 오직 우리를 영접하신 예수와 하나님의 은혜가 있을 뿐이다(cf.37). 그 사실에 대한 체험과 고백이 우리 속에 있는 소금이다.


“소금이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