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시편 49편 (고라 자손의 시) – 나의 생명되신 하나님 (시 49:1-20)
"7 아무도 자기 형제를 속량하지(‘파다’) 못하며 그를 위한 속전을(‘코페르’) 하나님께 바치지도 못한다. 8그들의 생명을 속량하는(‘피드욘’) 값이 너무 엄청나서 영원히 마련하지 못한다…. 15 그러나 하나님은 내 영혼을 스올의 손아귀에서 속량하시고(‘파다’) 나를 받으시리라."
생명의 값은 얼마일까? 누가 무엇으로 한 사람의 생명의 값을 치를 수 있을까? 베냐민을 애굽으로 데리고 가겠다며 르우벤은 야곱에게 자기 두 아들의 목숨을 베냐민의 생명에 대한 담보로 제시한다(창42:37). 그러나 두 사람의 목숨을 거둔다고 어찌 다른 한 사람의 목숨을 대신할 수 있겠는가? 야곱은 르우벤의 제안을 거절한다(창 42:38). 그런 야곱이 유다의 말에는 베냐민을 내어준다. 유다가 내건 담보는 자기 자신이다. 자신의 목숨을 내어 준다는 의미로 자신이라는 말이 아니라 ‘만일 베냐민을 다시 데려오지 못하면 자신이 영원히 야곱에게 죄를 짓는다’는 의미로 자신이 담보이다(창 43:9).
누군가를 죽인다고 죽은 누군가가 다시 살아 나겠는가? 두 사람의 목숨이라고 한 사람의 목숨보다 두 배로 가치가 있겠는가? 누군가의 생명을 해한 자는 영원히 죄를 지은 자로 남겨지는 것이 맞다. 한번 스올에 넘겨진 자를 돌이킬 수 있는 자가 없으니 말이다.
사람은 다른 사람의 생명의 값을 지불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그 자신 죽음을 피할 길이 없다. 자기 생명의 값을 지불할 수 있는 부자나 권세자도 이 땅에 없다. 억만 금을 가지고 있다해도 자기 생명을 죽음에 넘겨주지 않을 자가 없다(9,10,12,14,19,20).
그런데 시편기자는 사람에게 불가능한 그 일이 하나님께는 가능하다고 말한다. 사람은 생명의 값을 지불하여 그것을 다시 사올 수 없지만(7) 하나님은 시인의 목숨 값을 지불하고 그것을 스올의 손아귀에서 취해올 수 있다고 말한다(15). 생명이 생명을 대신한다고 죽은 자가 살아나지 않지만,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게 하시는 생명의 능력으로 생명의 값을 지불할 수 있고, 그 생명을 죽음의 손아귀에서 건져낼 수 있다.
레위인들은 이스라엘 백성의 생명 값을 대신하는 살아 있는 속전이었다(민 3:12-13). 예수는 당신 백성의 생명 값을 대신하는 살아 있는 속전이다. 죽고 다시 살아나신 영생하는 속전이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죽음으로 끝나는 영원히 짐 져야 할 죄에서(cf.창 43:9) 사람을 속량할 수 있다.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분의 한결 같은 사랑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분을 향한 찬송이 내게 있으니, 나의 생명 되신 하나님께 내가 기도합니다.”(시 4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