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긴과 보아스 (왕상 7:13-22)

 

솔로몬의 성전에 필요한 놋 기구의 제작을 위해 두로에서 히람이 파견된다. 히람의 어머니는 이스라엘 사람이고, 그 아비는 두로 출신 놋쇠 대장장이다(14). 역대하는 히람의 어머니가 단 지파 출신이라고 한다(대하4:11). 열왕기는 그의 어머니는 과부이고, 그는 납달리 지파라고 한다. 복잡한 개인사를 뒤로 하고 히람은 모든 놋 일에 있어서 지혜와 총명과 지식을 구비한 사람이었다. 유다 지파 출신 브살렐이나 단 지파 출신 오홀리압이 여호와의 영으로 충만하여 성막에 대해 행했던 일을(출31:3;35:31) 이스라엘과 이방의 배경을 함께 갖고 있는 히람이 행한다.

 

솔로몬의 성전 앞에다 히람은 두 개의 놋 기둥을 세우고 그 이름을 야긴과 보아스라 하였다(21). 이 둘은 성전의 의미를 구체화하고 있는 상징물이다. ‘야긴 보아스‘의 뜻을 새기면 ‘그가 그의 힘으로 세울 것이다‘가 될 것이다. 야긴과 보아스는 18규빗 높이의 두 기둥(‘아무드‘)이다. 성경에서 ‘아무드‘(기둥)가 처음 등장하는 자리는 출13장의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이다(13:21). 이 두 기둥은 그 힘으로 애굽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행하심의 증인이며, 또한 이스라엘 진중에 거하는 하나님의 임재 하심의 표현이고(민12:5;신31:15), 이스라엘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동행의 증거였다(민14:14).

 

야긴과 보아스 두 기둥에는 5규빗 높이의 머리가 놓였고, 그 머리는 사슬모양으로 땋은 줄과 석류로 장식되어 있었다(17,18). 땋은 줄(‘게딜림‘)은 야긴과 보아스 기둥 머리에 각 7개씩 달렸다. 그런데 모든 이스라엘 백성의 옷 가에도 땋은 줄(‘게딜림‘)이 4개씩 달려 있었다(신22:12). 소위 ‘치치트‘라 불리는 것으로, 청색 실을 엮어 땋아 만든 술을 옷깃에 달아 애굽 땅에서 인도해낸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와 같이 성전 앞에 있는 두 기둥에도 7개의 땋은 술이 달려 하나님의 구원을 기억하게 했다.

 

땋은 줄은 ‘사슬(샤르쉐로트)‘ 모양으로 만들어졌는데, 이스라엘 지파들의 이름이 새겨진 두 보석을 금테에 물려 제사장의 어깨 위에 둔 어깨받이에도 순금으로 만든 ‘사슬(샤르쉐로트)‘이 달려 있었다(출28:14). 이 사슬은 제사장의 판결 흉패에 달린 금고리에 연결되었다. 말하자면 이 사슬이 제사장 두 어깨에 놓인 두 개의 보석과 12개의 보석이 박힌 흉패를 연결하면서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제사장의 가슴과 어깨 위에 두는 역할을 하였다. 제사장의 어깨 위에 놓인 각기 여섯 지파의 이름이 새겨진 두 보석처럼, 성전 앞의 두 기둥은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나타내는 듯도 하다.

 

야긴 보아스 곧 여호와께서 그의 힘으로 세우고자 하는 것은 다름 아닌 그의 백성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이다. 히람의 원조와 지원으로 다윗 성이 세워지는 것을 보며 다윗이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위해 자기를 이스라엘 위에 왕으로 세웠음(야긴)'을 알아차렸듯(삼하5:12),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신들의 삶 가운데서 하나님의 일하심과 손길을 발견하지 않을 수가 없다.

 

성전 앞에 세워진 두 기둥은 일견 힘과 세력의 과시로만 보이지만 사연 많은 히람은 그 안에 여러 겹의 이야기를 담아 놓는다. 언뜻 보면 그 이야기를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나, 하나님 앞에 서서 자기 삶을 돌아보면 여호와 그가 당신의 힘으로 자기 백성을 세워 오신 이야기를 알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안에 제사장의 옷 밑에 금 방울과 더불어 수놓아진 석류가 같이 흔들리고(18; 출28:33), 포로에서 돌아와 백합화처럼 필 자녀들의 이야기도 들려온다(19;사35:1;호14:5). 투박한 상처들뿐 별 의미 없이 서 있는 듯한 나와 너의 인생도 그분 앞에 서면 그분이 세워오신 이야기를 들려주리라.

 

-----------------------------

물두멍(바다), 물두멍(이동용), 물두멍(회막 앞) (왕상 7:23-39)

 

제사장의 손 발을 씻기 위한 놋바다와 제물을 씻기 위한 이동용 물두멍 10개가 만들어진다(23,38;대하4:6). 모양이야 히람의 의견이 반영되었다 해도 크기와 수량에 대해서는 아마도 솔로몬의 주문이 있었을 것이다. 4만4천 리터의 물이 담기는 거대한 놋바다와 880리터 들이 이동용 물두멍 10개가 솔로몬 성전 앞에 놓인다. 광야에서 제단과 회막 사이에 놓였던 물두멍이 솔로몬 성전에서는 제사장의 정결을 위한 놋바다와 제물을 씻기 위한 이동용 물두멍으로 나누어진다 (열왕기에는 흥미롭게도 제단 제작에 대한 언급이 없다).

 

회막 앞에 놓인 물두멍의 모양에 대해 성경은 별다른 설명이 없다. “너는 물두멍을 놋으로 만들고 그 받침도 놋으로 만들어 씻게 하여라“(출30:18)가 물두멍의 형태와 기능에 대한 설명의 전부이다. 그런데 솔로몬의 성전에 설치된 이동용 물두멍의 경우 그것을 제작한 히람을 제외하고는 정확히 어떤 모양으로 만들어졌을지 감을 잡기가 어렵다. 모르긴 몰라도 다양한 역본의 번역자들도 자신이 지금 어떤 대상에 대한 묘사를 하고 있는지 결정하지 못한 채 단어와 단어를 이어 놓는 것이 전부였을 것이다.

 

성전 앞뜰에 들어서는 사람들은 놋바다의 크기와 이동용 물두멍의 수량에 압도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크다 해도 그 크기가 정해져 있다면 그 물두멍에 담긴 물은 결국 유한하다. 그에 반해 회막과 제단 사이에 놓인 (그 크기가 아마도 훨씬 작았을) 광야의 물두멍은 크기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혹자들은 이것을 정결하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무한함을 상징하는 것이라 이해한다. 그럴듯해 보인다. 성경은 물두멍의 크기 보다는 회막 앞에 놓인 물두멍을 구성하는 재료에 관심을 보인다. 놋으로 만들어진 물두멍은 회막 문에서 수종드는 여인들의 동경으로 만들어졌다(출38:8).

 

회막 문에는 수종드는 여인들이 있었다. 제물을 잡고 씻고 치우고, 재를 담고 치우고, 버리고, 고기를 삶고... 이 모든 일에 있어 여인의 손길이 필요하지 않았겠는가? 남성 사제들만의 영역으로 보였을 회막 문에는 특정할 수 없는 다양한 일들을 감당했던 여인들이 있었다. 그들의 섬김과 수종을 나타내는 히브리어 표현은 만군의 여호와(야웨 체바옷)라는 하나님의 이름에 등장하는 ‘체바옷‘의 동사형인 ‘차바‘이다. 전쟁에 나가는('차바') 섬김을 남자들이 했다면, 여기 여인들은 회막 문에서 수종드는('차바') 섬김을 하고 있다.

 

그녀들의 동경이 제사장의 더러움을 씻는 물두멍을 이루는 재료가 되어 그들의 죄와 허물을 비추어도 주고 씻어도 준다. 하나님의 영광은 놋 바다의 크기나 이동용 물두멍의 복잡함 또는 화려함보다 오히려 있는지도 모르는 여인들의 대접받지 못하는 섬김의 삶을 자신의 이야기 가운데 무심한 듯 엮어 넣으시는 하나님의 소박하심 가운데 담기는 것이 알맞아 보인다.

 

스스로 씻을 수 없는 자가 스스로를 씻고자 하는 헛된 노력이 부풀리고 키워낸 놋 바다나 이동용 물두멍은 그 크기가 아무리 크다 해도 기껏해야 5만2천8백리터의 물을 담는다(바다+물두멍 10개). 그것으로 나의 죄와 허물을 씻을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 여긴다면, 스스로를 씻고자 하는 헛된 시도를 그만두고, 스스로를 비추는 거울을 녹여 작고 소박한 내 삶의 물두멍에 그분의 은혜를 담으시는, 하나님의 섬김에 자신을 내맡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