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리적이고 기만이 없는 젖 (벧전 2:1-10)

- 2012년 6월 3일 주일

합리적이지 않은 곳에 기만이 있었다(1).

전에는 우리가 악함, 기만, 외식, 시기, 비방으로 살았다(1).

전에는 무엇이 가치 있는 것인 줄 몰랐다. 보배를 알아보지 못하고 오히려 내버렸다(4).

전에는 우리가 어두운 데에 있었다(9).

전에는 우리가 주의 백성이 아니었다(10a).

전에는 긍휼을 알지 못했고, 누구에게도 긍휼을 베풀지 못했다(10b).

그런 우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다. 그 이후로 모든 것이 달라졌다.

 

주님은 한마디로 좋은 분이시다(Lord is good, 크레스토스 호 퀴리오스)(3).

좋으신 하나님을 만나자, 더 이상 기만, 외식, 비방으로 살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기만이 아닌, 신뢰선함이라는 토대가 생기자(3),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게 되었다.

합리적이고 거짓이 없는 젖을 맛보고 난 뒤(2)

세상은 더 이상 무서움이 아니고, 인생은 더 이상 의미 없는 혼돈과 소리지름이 아니었다.

버려진 돌에서 보배가 보였다. 버려진 우리를 보배로 여기시는 분을 만났다(4).

그러자 우리 또한 다른 것을 값있다말할 수 있게 되었다.

어둠이 걷혔다. 모든 것들이 밝은 빛 가운데 드러났다(9).

긍휼이라는 빛을 만났고, 긍휼을 베푸는 자가 되었다(10b).

왕 같은 제사장, 택하신 족속, 거룩한 나라, 그의 소유인 백성이 되었다(9).

 

주님의 선하심을 맛 본 이후,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게 되었다.

구원에 이르도록 날마다 이 '합리적이고 기만이 없는 젖'(주의 선하심)을 맛보며, 자라가야 하리라(2)!

 

너희는 주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찌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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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발적 포기 (벧전 2장 11절-25절)

- 2012년 6월 4일 월요일

우리는 매일 자기 자신과 싸우며 산다(11).

베드로는 자기와의 싸움을 전쟁이라 표현한다(11b).

 

몸숨을 위협하는 적의 정체는 다름 아닌 '욕망'이다(11).

스스로가 세상의 중심이 되고자 하는 욕망.

권세를 부리고, 힘으로 누군가를 누르고 싶은 욕망. 권력에의 의지... (cf. 13. 18. 23)

 

니체가 본대로 기독교는 권력에의 욕망을 정죄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권력욕을 실현할 수 없는 원한의 인간의 권력에 대한 저주로서 권력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 대한 존중과 공경, 존대와 사랑에서 비롯된 자발적 자기 권리의 포기로서 권력과 싸운다(17).

 

자기 몫으로 주어진 권리를 다른 이를 위해 자유로이 포기하는 것(16).

마땅히 누릴 수 있는 휴식의 시간을 다른 이를 위해 반납하는 것(18).

미래를 위해 성실히 일하여 쌓아 놓은 재물을 그것이 필요한 다른 이를 위해 기꺼이 내어주는 것.

내게 욕하고 위해를 가하는 자에게 맛대어 욕하지 않고, 위협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들의 죄의 짐을 대신 감당하는 것(23-24)

사랑에서 비롯되는 자발적 자기 권리의 포기! 그리스도인의 날마다의 싸움!

 

우리는 나그네요 거류민이다. 우리는 '자발적 권리 포기자들'로서 이땅의 거류민이다(11).

이 사실을 놓치는 순간 우리는 길을 잃을 것이고(24), 갈 길을 잃은 자는 더이상 나그네가 아닌 떠돌이일 뿐이다.

아! 내 영혼의 목자와 감독되신 주님이, 우리를 위해 당신 모든 권리를 내려 놓고, 우리 앞서 싸우신다(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