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로아 물과 창일한 하수 (사 8:1-10)

2012-8-16 목요일

아직 예루살렘은 아람-에브라임의 위협을 받고 있고, 함께하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공허해 보인다. 735년~732년, 3년여 지속된 아람-에브라임 전쟁의 위협 속에서, 하나님은 그 사이 이사야에게 태어난 아들, 마헬살렐하스바스(노략이 속함)를 통해(3), 다시 한번 아람과 에브라임의 위협이 제거될 것임을 약속하신다(4). 그 아들이 말을 배우기 전, 그러니 2년이 채 안 되어 이 일이 일어날 것이다.

 

지나 보면 짧은 세월이다. 그러나 그 시간을 통과하고 있는 자들에게 시간을 견디는 일은 쉽지 않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다림을 놓아 버리고 성급히 행동하기를 선택한다. 그리고 후회한다. 2년의 기다림이 20년의 기다림이 되고 마는 것이다.

 

백성들은 앗시리아 편에 줄을 대었던 아하스의 정책을 기뻐하지 않았다(6).백성들은 부상하는 강대국 앗시리아에 머리를 숙이는 것(=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이 아닌, 르신과 베가의 반 앗시리아 연합에 함께하기를 원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가? 앗시리아 따위에 종속되는 것이 말이 되는가? 아람도 심지어 에브라임도 앗시리아에 반역하여 조공 바치기를 거부하는데, 우리가 앗시리아 편에 붙는 것이 말이 되겠는가?" 이것이 백성들의 생각이었다(6).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을 거부하고 르신과 베가를 기뻐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창일하고 흉융한 하수, 곧 앗수르 왕의 세력이 유다의 턱밑까지 이를 것이라 말씀하신다(7).

 

여기가 참 어려운 부분이다. 하나님은 한동안 앗시리아를 통해 북왕국 이스라엘을 포함한 주위 나라를 징계할 것이고, 그것으로 유다 또한 교훈하실 것이다(10:6). 그러니 아람-에브라임의 반앗시리아 동맹에 가담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렇다고 앗시리아에 여호와의 전의 곳간을 열어 도움을 요청하는 것(왕하16:8) 또한 잘했다고 볼 수는 없다. 앗시리아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아닌, 앗시리아을 통해 아람-에브라임 두 나라를 징계할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을 구하는 것이(7:11) 아하스의 할 일이었다. 이후 앗시리아가 아람-에브라임을 친 것은 아하스에게 돈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의 필요 때문이었다. 이후 블레셋의 공격 앞에 성전 곳간을 열어  아하스가 앗시리아의 도움을 요청했을 때, 더 이상 팔래스틴 지방에 관심을 둘 이유가 없었던 앗시리아는 돈만 받고 아하스의 도움 요청을 거절했다. 앗시리아는 앗시리아의 국익을 위해 움직일 뿐, 돈을 받았다고 아하스 편을 들어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도 저도 아닌 어정쩡해 보이는 이 대외 관계는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굳건한 믿음을 가진 이에겐 확고한 정책이 되기도 한다. 사람들은 '모 아니면 도' 식의 확실한 결론을 바란다. 그 사이 견디고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 단 1주일이어도 그것을 참아내기 어려워 한다. 그러나 유다의 목에까지 흘러 들어올 앗수르의 창일한 하수 속에서도 '임마누엘이여~!'를 믿음 가운데 말할 수 있는 사람(8), 인생사와 세상사가 사람들의 뜻과 계획이 아닌 '우리와 함께 하시고 계시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 가운데 이루어짐을 믿는 사람은(10), 그 모호함을 넉넉히 건너간다. "천천히 흘러가는 실로아 물"은 빨리 끝장을 봐야할 모호함의 시간이 아니라, 한 아이가 잉태되고, 태어나고, 자라, 엄마 아빠라 부르게 될, 새로운 미래가 잉태되는 시간일 수 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있다는 사실을 굳게 믿을 수 있다면(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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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모 Conspiracy (사 8:11-22)

2012-8-17 금요일

속임수를 통해 상대방을 넘어뜨리고자 할 때 사람들은 이를 음모 또는 모략이라 부른다. 그러나 모든 모략이 다 부정적인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전쟁, 특히 동양의 전쟁은 힘 대 힘의 싸움일 뿐 아니라 모략 대 모략의 싸움이다. 특별한 전략이 필요 없는 압도적인 군세의 차이 속에서도 전략가는 피해를 최소화 할 길을 찾는 법이다. 최소한의 피해로, 최선의 결과를 내기 위해 전략을 세우는 것 그 자체가 나쁜 일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때로 자신의 의도와 힘을 감추고, 때로 과장된 몸짓을 보이고, 때로 숨죽여 기다리고, 때로 강력한 힘을 보이는 것 그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얻고자하는 목표가 악할 때 음모는 악한 것이 된다.  

 

본문에서 하나님은 일종의 음모를 가진 분으로 나타난다(14, cf.12). 참으로 거룩하신 하나님, 그 백성의  성소가 되시는 하나님은 동시에 유다와 이스라엘에게 걸려 넘어지는 반석과  함정, 그리고 올무가 될 것이다(14). "임마누엘"의 약속을 덩그라니 던져 놓고, 하나님은 이제 야곱의 집에 대해 얼굴을 가리우실 것이다(17). 이스라엘 왕 베가가 2년후(732년) 앗수르에 의해 죽임을 당할 것이고, 그후 10년(722/1)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망해 온 땅으로 흩어질 것이다. 유다에 대해서는 아하스의 아들 히스기야 때, 앗수르는 마침내 예루살렘을 침공할 것이다(701년). 30년 동안 몰아닥칠 전쟁의 혼돈과 두려움의 소문 속에서(12,22) 사람들은 신접한 자와 마술사를 찾을 것이다(19). 하나님의 백성이 나라를 잃고 헤매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그들의 마음에서 빛을 앗아 갈 것이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흑암이 그들을 덮을 것이다(22).

 

음모! 정녕 그것인가? 함께 하시겠다는 임마누엘의 약속 과 야곱 집에 대하여 얼굴을 가리우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 과 포로로 끌려가는 이스라엘.... 이 환난과 흑암의 이야기 그 배후에 어떤 숨겨진 음모가 있단 말인가? 150년 뒤, 비슷한 상황 속에서, 예레미야를 대적했던 하나냐가 밝히는 배후의 음모는 "2년 후에 모든 포로가 바벨론에서 돌아온다는 것"이었다(렘28:3). 잠깐의 환란과 연단, 그 후 주어지는 회복, 이것이 하나님의 숨은 뜻이라고 그렇게 믿고 싶었다. 이사야 때도 마찬가지였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릴리가 없다면, 앗수르에 의한 위협은 잠깐의 환란이다. 앗수르에 의한 이스라엘의 멸망도 잠깐의 환란이다.... 그 잠깐이 지나면 하나님은 다시 회복시키실 것이다. 일상의 평안함을 소망하는 우리의 소망을 닮은 그들의 하나님의 음모에 대한 이해는 그러나 틀렸다.  그리하여 올무에 걸렸고, 함정에 빠졌다. 포로기는 한세대가 다 지나가도록 끝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유다 또한 포로로 사로잡혀 가게 될 것이다... 이 모든 사건들 뒤에 어떤 음모가 놓여 있는가?

 

아니다. 함께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음모가 아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자기 백성에게서 빛을 거두지 않았었다. "어떤 사람이 너희에게 신접한 자에게 물으라 하거든 백성이 자기 하나님께 구할 것이 아니냐?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따를지니', 신접한 자들이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않으면 그들은 아침 빛을 보지 못할 것이다."(19-20) 이해할 수 없기에 어둠인 오늘의 삶에도 빛이 있다. 불확실한 미래를 알려준다는 신접자들과  한순간의 대박을 약속하는 마술사들의 말이 아닌(19), 율법과 증거의 말이 빛이다. 그 말을 마음에 담은 말씀의 제자(16)는 아침 마다 빛을 볼 것이다(20). 말씀을 사모하는 자들, 그들에게 임마누엘은  항상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