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끌, 바아사, 헛것 (왕상 15:33-16:14)

 

“내가 너를티끌에서 들어 내 백성 이스라엘 위에 주권자가 되게 하였거늘...”(왕상 16:2) “그들이 범죄하고 또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하여 그들의헛된 것들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였더라”(왕상 16:13)

 

하나님께서는 티끌에서 바아사를 들어올려 주권자가 되게 하셨다. 그런데 바아사는헛된 것들를 쫓아 범죄하여 스스로 무너져갔다. 본래 모든 사람은 티끌에서 빚어졌다. ‘헛것이었던 인간이 살아 있는 존재가 된 것은 하나님의 숨이 그 안에 불어넣어졌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영을 통해헛것인 인간이살아 있는 존재가 되었던 것이다. 그가 다만 헛것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영을 통해 얻은 생명으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바아사는스스로의 손을 스스로가 채우고자 하는시도 가운데(cf.왕상13:33) 헛것에 헛것을 더하며 바람에 날리는 겨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여로보암의 집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은 단순했지만 분명했다. 하나님께서 그의 집을 견고하게 세워줄 것이니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살아가라는 것이다(왕상12:38). 따라서 여로보암은 스스로의 왕권을 지키기 위해 손을 모아야 했던 것이 아니라(cf.왕상12:26)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살면서 하나님께서 그의 손을 채우시도록 그의 손을 펴고 있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여로보암도 바아사도 스스로가 스스로의 빈 손을 채우고자 힘쓰고 애쓰다 자신의 공허만을 더욱 깊이 확인했을 뿐이다.

 

헛것인 인간이 헛되지 않게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자신의 헛되지 않음을 증명하고자 몸부림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다만 티끌에서 올려진 헛것임을 인정하고, 그러한 자신을 들어 생명을 주시는 분이 다름 아닌 하나님임을 신뢰하며 그의 영을 힘입어 오늘을 그분 앞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다윗의 온전함은(왕상 9:4;11:4,6;15:3) 그의 흠 없고 실수 없는 완벽한 삶이 아니라 자신이 다만 헛것이며(39:5) 그렇기에 그의 소망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음을 기꺼이 고백하고 살아온 그의 정직함일 것이다(왕상 14:8;대상2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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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생각, 그의 노여움 (왕상 15:33-16:34)
 
“네가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며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하여 그들의 죄로 나를 ‘노엽게‘ 하였은즉 내가 너 바아사와 네 집을 쓸어버려 네 집이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집 같이 되게 할 것이다.“(16:2,3)
 
하나님께서 선지자 하나니의 아들 예후를 통해 바아사를 꾸짖으며 하신 말씀이다(1). 위 말씀은 얼핏 보면 바아사가 하나님을 ‘노엽게‘하였기에 하나님께서 그와 그의 집을 쓸어버리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바아사는 24년간 왕위에 있다가 아무 일없이 죽어 조상들과 함께 묻혀 디르사에 장사된다(6). 이는 여러보암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선지자 아히야를 통해 여로보암 집의 재앙에 대해 말씀하셨지만(14:10-11), 정작 여로보암은 22년 동안 통치한 후 아무 일 없이 조상들과 함께 묻힌다(14:20). 일은 그들 사후 2년에 벌어진다. 그들의... 아들들인 나답과 엘라 2년에 모반이 일어나 그들의 집이 삼켜진다.
 
그렇지 않으면 망하지 않았을 그들의 통치가 하나님의 개입으로 인해 무너져 내렸던 것일까? 아니면 그대로 두면 망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 가운데 있는 여로보암과 바아사의 집에 대해 하나님께서 ‘너 그대로 가면 반드시 망한다‘는 경고를 주고 계셨던 것일까? 여로보암과 바아사는 나름 잘 살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자기를 섬기지 않는다며 몽니를 부렸던 것일까? 아니면 2대를 채 넘기지 못하고 무너져 내릴 수 밖에 없는 어리석고 미련한 길로 그들이 가고 있기에 하나님께서 그들의 결국에 대해 엄중히 경고하셨던 것일까?
 
‘여호와를 노엽게 하였다(‘카아스‘)‘는 문장에서 ‘노엽게 하다‘는 말은 ‘괴롭게, 슬프게, 근심하게, 속을 태우게, 안타깝게, 격노하게, 고통스럽게 하다‘ 라고 옮겨질 수 있다. 시편6:8;31:9에서는 근심하다로, 브닌나와 한나의 관계에서는 브닌나가 한나를 격동케 하였다고 옮겨진다(삼상1:6,7 개역). ‘카아스‘는 열왕기에서 20번 사용되는데 모두 헛된 우상을 섬기며 어리석고 미련한 길을 가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표현할 때 사용된다. 그 중 7번이 15:30-16장 문맥에서 나타난다.
 
여로보암의 길을 따라 왔던 이스라엘은 아합 때에 이르러 마침내 수도에 바알 신전을 만들고 그를 섬기는 제단을 쌓는 자리에까지 이른다. 성전 산 앞에 그모스와 몰록을 위한 산당을 짓고, 아스다롯과 밀곰의 길로 행했던 솔로몬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11:5-8) 역대 이스라엘 왕들 가운데 가장 악한 길로 오므리의 집이 행한다. 그러한 모습을 보며 하나님은 고통스럽고 슬프고 격동되고 안타깝고 분노하고 근심한다(15:30;16:2,7,13,26,33).
 
헛된 것들을 섬기며 그것들의 종이 되어 마침내 스스로 망하지 않을 수 없는 길을 가고 있는 자기 백성을 보며 하나님은 그들에게 경고하고 또 경고한다. 그 길로 가면 너희는 반드시 망하고, 무너진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한번 들어선 길에서 돌이키지 못한다.
 
그 때에 벧엘 사람 히엘이 여리고를 건축한다. 터를 쌓을 때에 맏아들 아비람을, 성문을 세울 때에 막내 아들 스굽을 대가로 지불하고 성이 세워진다(34). 여호수아의 맹세대로 저주를 받아 그 아들을 잃었던 것이 아니라, 그 아들을 인신제물로 바쳐 성을 건설하고 있다. 스스로 자기 뼈를 갉아먹고, 자기 살을 먹으면서 죽음의 길을 가고 있는 자기 백성을 보며 하나님은 고통하시며 경고하고 또 경고한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어찌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겔 18:23)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사 55:7) – 그 때나, 포로기나, 지금이나,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생각은 한결 같으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