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6장 - 주여, 당신은 누구십니까? (행 26:15)

 

“주여, 당신은 누구십니까?(15) – 이렇게 물으면서 바울은 아마 자신이 어떤 신현의 현장에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위한 열심으로 나사렛 이단의 무리를 박해하려 가면서 그에게 신현이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그의 열심을 지지하고 격려하기 위함일 것이다...라고 그는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물음에 대한 대답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15)였다.

 

나타난 주님은 그가 핍박하는 예수였다. 바울은 그 동안 어떤 분을 주님을 알고 섬겨왔을까? 바울은 자신이 ‘주님‘이라 부르는 분이 누구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고, 오히려 그의 원수로 행하고 있었다.

 

내가 믿고 섬긴다고 하는 주님은 도대체 어떤 분일까? 나는 그를 제대로 알고서 믿고 섬기고 있는가?

그러나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나 자신이 낼 수 없다. 스스로를 돌아보고 점검한다고 내가 주님을 제대로 알고 섬기고 있다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부족한 것은 열심이 아니고, 더 깊은 지식도 아니며, 자기 절제적 훈련도 아니다. 다메섹으로 가는 길, 주께서 바울의 인생 속으로 충돌하여 들어오지 않으셨다면, 그 스스로의 경건과 노력과 수양으로 예수가 주님이라는 사실을 결코 알 수도, 믿을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가 그의 인생에 충돌하여 들어오신다. 그가 자신을 바울의 주님으로 나타내 보이신다. 주를 섬긴다며 주의 원수로 살고 있던 바울, 그 답 없는 인생길을 걸어가던 자를 찾아, 그를 돌이켜, 그의 주님으로 자신을 나타내시는 주님, 소망은 그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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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아, 네가 미쳤구나! (행 26:19)

 

예수의 부활에 대해 듣던 베스도가 바울의 말을 애써 떨쳐버리려는 듯 소리를 지르며 말한다.
“바울아, 네가 미쳤구나. 너의 많은 배움이('그람마타') 너를 미치게 하였구나!“(19)  

‘미치게 하였다‘는 말에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말이 쓰인다. 바로 ‘마니아‘다.

제정신이 아니다. 사태를 오판했다. 한쪽으로 치우쳤다.

베드로가 문 밖에 와 있다고 얘기하는 소녀 로데를 보고 성도들은 그녀가 미쳤다고 말한다(행12:15).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선한 목자로 자신을 제시하는 예수에 대해 유대인들은 그가 귀신들려 미쳤다고 말한다(요10:20).

온 교회가 방언으로만 말하면 교회 밖 사람들은 그들이 미쳤다고 생각할 것이라고 바울이 말한다(고전 14:23).

 

미쳤다는 말이 제정신이 아니며 사태를 오판했고 한쪽으로 치우쳤다는 말이라면 그럼 제정신, 바른 판단, 치우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고후5장에서 바울은 자신이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함이고, 바른 정신이어도 성도들을 위함이라고 말한다(고후5:13). 이 때 ‘미쳤다’고 번역된 말은 ‘엑시스테미’ 그러니까 자기 밖에 서있다는 말이다. 사람은 자기가 서 있는 자리를 기준으로 정상과 비정상, 제정신과 제정신이 아님, 치우침과 균형을 판단한다.

 

바울은 죽은 예수가 살아 있다고 이야기 한다(행25:19; 26:8,23). 그리고 이 일은 선지자들이 이미 예언한 일의 성취라고 말한다. 성경을 알고 있던 아그립바와는 조금 다른 자리에 서 있던 총독 베스도이지만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반복적으로 확신 가운데 말하고 있는 바울의 이야기에 뭔가가 있어 보인다. 자기가 서 있는 자리를 위협하여 들어오려고 한다. 본능적 저항감에서 베스도가 바울의 말을 떨쳐내고자 소리를 지른다. 바울아! 네가 미쳤구나!

 

그러나 자기가 서 있는 자리가 바르고 옳으며 정상적인 자리인지 사람은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바울의 말을 듣고 있는 총독 베스도, 왕 아그립바 2세, 그의 여동생이자 동거녀로 생각되는 베르니케(26:30) 그들이 지금 서 있는 자리는 제정신이라 말할 수 있는 자리인가?

 

한쪽으로의 치우침을 미친 것(마니아)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바울이 치우쳐 있는 곳, 바울이 서 있는 자리는 예수의 주되심이다. 가이사에게 호소한 것을 철회하고 자기를 이해해주는 총독이나 권력자를 통해 감옥에서 벗어나고자 애써야 마땅해 보이는 때에 바울은 자기에게 주어진 변론의 기회를 복음을 설명하는 데에 사용한다(26:1). 그리고 그는 가이사 앞에 서려고 한다. 자기에게 일어난 복음의 이야기를 자기로부터 들려주는 변론(‘아포(~로부터)-로기아(말함)’)을 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