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니아와 삽비라, 큰 은혜와 큰 두려움 (행 4:32-5:11)

                                       

33 ‘큰 능력‘으로 사도들이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큰 은혜‘가 그들 모두 위에 있었다.

5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들었을 때, 쓰러져 숨을 거두었다. ‘큰 두려움‘이 듣는 모든 사람들 위에 있었다.

11 ‘큰 두려움‘이 온 교회 위에 그리고 이것을 듣는 모든 사람들 위에 있었다.

 

죽은 자들 가운데서 예수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큰 능력‘이(4:33)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던 자를 걷게 하고, 아무리 노력해도 죽음 말고는 다른 결말을 만들 수 없는 자들에게 생명을 주는 일들이 나타나면서, 교회는 ‘큰 은혜‘를 누리게 되었다.

 

‘큰 은혜‘가 모든 사람들 위에 있었고(4:33), 그 은혜를 아는 자들이 은혜가 필요한 이들에게 아낌없이 은혜를 베푸는 삶이 이루어지고 있었다(4:32-35). 그러던 교회가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을 겪으면서 ‘큰 은혜‘가 아닌 ‘큰 두려움‘이 모든 사람들 위에 나아가 교회 위에도 있게 되는 상황을 맞게 된다.

 

교회의 순결과 거룩함을 지키기 위한 하나님의 선택이었다는 식의 설명은 사도행전 기자의 이러한 대조를 제대로 감지하지 못하고 있다.

 

복음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을 증거한다. 복음은 죄인을 용서하며, 불경건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예수의 눈 앞에서 세 번 예수를 모른다고 맹세하며 ‘거짓‘을 말했던 베드로를 그 자리에서 죽이시는 것으로 교회의 영광이 서지 않았고, 그런 베드로를 위해 기도하며, 그런 베드로를 찾아가 그를 회복하는 데에 복음의 영광이 있었다. 사도들은 예수로 인해 그 부활의 능력을 알았고, 그 구원의 은혜를 체험했다.

 

은혜가 필요한 자에게 필요한 만큼 은혜를 베풀던 교회가, 백 번을 받아가도 백 번 다시 빈손이 되는 사람에게도 다시금 그의 필요를 채워주던 교회가, 평생을 시도해도 결국 반복적으로 실패하는 사람들에게 마치 처음인 것처럼 격려와 응원을 아끼지 않았던 교회가 밭을 팔아 일부를 감추고서라도 무언가를 내어 놓아야 하는 공간이 되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개인의 시기와 명예욕의 문제가 아니다. 시기와 명예욕이 어찌 이들만의 문제겠는가? 은혜로 시작된 공유가, 공유하지 않고는 중심 멤버쉽을 가질 수 없는 골드카드 특별회원제가 되어갔다. 유대교의 대표적인 재산 공유 공동체로 쿰란 공동체가 있었다. 그들 또한 모든 재산을 내어 놓고 소유가 아닌 공유를 선택하며 그 멤버쉽을 유지했다. 엄격한 경건과 엄밀한 율법의 준수를 요구했고, 오랜 시험과 수련의 과정을 거쳐 공식 멤버쉽을 가질 수 있었다. 초대교회 또한 자칫 스스로의 거룩을 지키기 위해 쿰란의 길로 들어설 수도 있었다.

 

그러나 교회 모든 사람들 위에 머물러야 하는 것은 큰 두려움이 아니라, 큰 은혜이고, 죽임의 권리가 아니라 죽은 자의 부활의 능력이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 이후에도 사람들은 재산을 팔아 사도들의 발 아래 아무 두려움 없이 내어 놓을 수 있었을까?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 이후 가난한 자 필요를 가진 자들이 어려움 없이 교회의 돈을 받아 자기 개인의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었을까? 한 두 번이 아닌 세 번 네 번의 도움을 구하며?

 

교회는 죽임과 두려움으로 멤버쉽의 경계와 한계를 분명히 해야만 비로소 유지 될 수 있는 비밀 결사가 아니다. 교회는 죽은 자들도 살리고, 연약한 자들도 치료하며, 죄인들을 용서하고, 불경건한 자를 의롭다고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가 누려지는 공간이다.

 

본문 어디에도 하나님께서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치셔서 벌하여 죽게 하였다는 말이 없다. 사도행전 기자는 마치 기사처럼 사건을 보도한다. 어떤 가치 평가도 없이. '이런 일로 인해 초대 교회에서 두 사람이 죽었다. 이런 대화가 오고갔다. 그들을 장례 치렀다. 그들 위에 큰 두려움이 있었다.'라고 보도한다.

 

그러나 그는 바로 앞 문단에서 이와 대조되는 교회의 모습을 보여준다. 사도들은 큰 능력으로 부활을 증거했고, 모든 사람들 위에 큰 은혜가 있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