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속자가 시온에 임하여 - 구속자가 시온에서 와서 ( 59:1-21)

 

 

59:20절은 바울에게 있어 소위 이스라엘 문제라 불리는 주제에 대한 최종적인 결론으로서 롬 11:26에서 인용된 구절이다. 그런데 참 어려운 것은 바울이 인용한 칠십인역과 히브리어 본문이 미묘한 차이를 보인다는 것이다.  

 

구속자가 올 것이다, 시온을 위해, 야곱 가운데서 패역에서 돌이키는 자들을 위해.“(BHS)

구속자가 시온을 위해 올 것이다, 그가 야곱으로부터 불경건한 것들을 돌이킬 것이다.“(LXX)

구속자가 시온에서 올 것이다, 그가 야곱으로부터 불경건한 것들을 돌이킬 것이다.“( 11:26)

 

구원자가 시온으로 올 것인가? 아니면 구원자 자신이 시온에서 나와 시온을 위한 구원을 베풀 것인가? 도대체 왜 바울은 히브리 본문이나 칠십인역이 시온을 위해/시온에게라 쓰고 있는 것을 시온에서라 표현하고 있는가? 여기에 어떤 의미 부여를 바울은 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단순히 바울이 가지고 있던 본문이 시온에서라고 표현되어 있었던가?

 

사실 시편에서 하나님은 항상 시온에서 나오고, 구원도 시온에서부터 베풀어진다.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오기를 원하도다.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포로된 곳에서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고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 14:7) 바울은 롬 11장에서 시편 14편을 생각하고 있는가?

 

이사야는 특별히 40장 이후에서 구원의 소식이 시온에서부터 열방으로 나가기 보다, 오히려 구원의 소식을 가진 자들이 시온으로 와서 시온에 위로와 회복의 소식을 전해준다.(41:27;51:16; 52:7;59:20). 복음이 시온에서 전파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시온에 복된 소식을 전달해준다. 그리고 마침내 이스라엘 가운데서 패역함에서 떠나는 자들을 위해, 시온을 위해, 구원자가 오신다(59:20). 그러니 이사야에서 시온으로 대표되는 이스라엘은 지금 패역과 반역과 죄악 가운데 놓여 있고, 구원이 필요한 상황 가운데 있다. 열방을 위한 빛으로, 땅 끝까지 구원을 베풀자로 선택된 이스라엘 자신이 오히려 빛이 없는 어둠 가운데 놓여 있다. 그리하여 그들 자신이 구원이 필요한 상황 가운데 있는 것이다. 시온에서 구원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시온으로 구원자가 와야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하나님의 선택 받은 백성, 어둠 가운데 빛이라 생각하고 있는데 있다. 그런데 이사야 53장부터 등장하기 시작하는 우리는 자신들의 허물과 죄악을 알고 고백한다. 53장에서 고난 받는 여호와의 종의 고난이 자신들의 죄악 때문이었음을 알아차린 이 우리는 이곳 59장에서 다시 등장한다(9-15). 자신의 범죄에 대한 그들의 인식은 깊고 진실하다(12). 그런데 바울은 스스로의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는 이들 우리를 위해 구원자가 오실 것이라 말하는 이사야 59장에서 모든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한 소망을 본다. 어떻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황폐와 파멸 가운데 버려두고 있는 것은(7) 이스라엘의 죄악 때문이다(1). 이스라엘이 범죄하는 입으로 부르짖고(3) 피 흘리는 손으로 하나님을 향하니(7) 하나님이 그 소리를 들을 수 없고, 하나님이 그 손을 잡아 줄 수 없는 것이다(2).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완전히 버렸거나 그들을 포기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패역함 가운데 있기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누릴 수 없는 것이다(1). 그러니 아직 이스라엘에게는 희망이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들을 버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문제는 하나님과 그들 사이를 갈라낸 죄악때문이다(2). 그런데 바로 이 때 자신들의 참담한 상황을 알아보고, 자신들의 죄악을 고백하는 우리들이 등장하여,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며 부르짖는 것이다(11). ~! 하나님은 이들의 소리를 들어주실 것인가?

 

“15… 여호와께서 보셨다. 정의(/공평)가 없음을. 그것이 그의 눈에 악해 보였다. 16. 그가 보았다. 사람이 없음을. 그가 스스로 이상히 여겼다, 중재해주는 자가 없음을. 그의 팔이 그를 구원했다. 그의 의, 그것이 그를 지탱했다. 17. 그가 의를 갑옷처럼 입었다. 구원을 투구로 그의 머리에 썼다. 그가 보응의 옷을 속옷으로 입었고, 열심을 겉옷처럼 감쌌다. 18. 행위들을 따라 그가 갚으실 것이다. 그의 대적에게 분노로, 그의 원수들에게 보응으로... 섬들에게 그가 보응할 것이다. 19. 서쪽에서부터 여호와의 이름을 그들이 두려워할 것이다. 해 뜨는 곳에서부터 그의 영광을 (두려워할 것이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영이 몰아가는 급한 강물처럼 그가 올 것이기 때문이다. 20. 구속자가 올 것이다, 시온을 위해, 야곱 가운데서 패역에서 돌이키는 자들을 위해. 여호와의 말씀이다. 21. 그러나 나는 - 이것이 그들과 세운 나의 언약이다 -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 네 위에 나의 영을, 네 입술에 나의 말들을 내가 둔다. 네 입에서 그것들이 떠나지 않을 것이다. 네 자손의 입에서도 그리고 네 자손의 자손의 입에서도,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 이제부터 영원까지.“

 

공평이 없어 사람이 살 수가 없다. 죄란 일차적으로 공평의 깨어짐이다. 공평이 깨지면 진실이 빼앗기고, 진실이 빼앗기면 포악과 궤휼이 횡횅한다. 배반과 속임, 포학과 패역(13)… 그 속에서 사람이 살 수가 없는 것이다(16). 누구의 잘못이라고만 할 수 없는 우리의 잘못으로 누구도 살 수 없는 공간, 그곳이 다름 아닌 시온이었다.

 

바로 그곳 시온을 향해 하나님 자신이 자신의 의를 의지하여 구원을 베풀기 시작하신다(16).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은 그들의 행위대로 갚아주는 공평을 건너뛰지 않는다. 하나님은 자신의 대적과 원수에게 분노로 갚아주실 것이다(18). 그의 분노로 갚음을 받을, 이들 그의 대적은 도대체 누구인가? 그 대적이 누구인지는 명백하지 않으나, 그의 보응의 결과는 명백하다. 바로 서쪽과 동쪽에서 여호와의 이름과 영광을 두려워함과 그의 영이 몰아가는 급한 강줄기처럼 구원자가 임하여 시온을 구원할 것이라는 것이다(19).

 

시온으로 와서 구원자는 어떤 자들을 구원할 것인가? 바울이 말하듯 온 이스라엘을 구원할 것인가? 맛소라 본문은 구원자가 와서 구원할 자는 자신들의 죄악에서 돌아오는 자들이다(20). 돌아오는 자들이니 그들은 물론 죄인이다. 그러나 그들은 죄악에 머물고 있는 자들이 아닌, 그 자리에서 돌이키는 자들이다. 그리하여 구원은 모든 이스라엘이 아닌, 죄악에서 돌아오는 자들에게만 임하게 된다. 그런데 어떻게 바울은 이곳에서 모든 이스라엘의 구원을 끌어낼 수 있단 말인가?

 

바울에 따르면 구원자가 할 일은 야곱 가운데서 불경건한 것을 제거하는 것이다. 불경건한 것이 제거된 야곱은 그렇기에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불경건한 것을 제거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불경건은 물건이 아니다. 불경건은 사람과 분리될 수 없다. 그렇다면 제거된다는 불경건은 그것이 제거된 사람과 직접적인 관계를 갖지 않을 수 없다. 그리하여 칠십인역과 바울은 다시 맛소라 본문과 연결된다. 불경건이 제거된 사람은 사 53장부터 등장하고 있는 우리‘, 곧 자신 안에 있는 깊은 죄의 현실을 확인함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자신들에게 임한 치유를 확인하고 있는 자들이었다. 그들의 불경건, 그것을 구원자가 제거할 것임을 사53장의 우리들 스스로가 증언하고 있다.

 

이런 본문 해석이 맞다 할지라도 어떻게 여기서 온 이스라엘의 구원이 결론으로 나올 수 있을까? 바울은 롬 11:26절에 이어 27절에서 사 59:2127:9 말씀을 결합하며 인용하여 이에 대한 답을 주는 듯하다. 이사야 27장은 59장의 쌍둥이 짝 같은 본문이다. 여호와는 포도원에 대해 노함이 없으시다(27:4). 비록 포도원의 가지들이 그들의 우상숭배와 죄악으로 인해 말라 꺾여졌다 할지라도(27:11) 그럼에도 여호와는 포도원에 대해 노함이 없으시다. 오히려 그는 그의 원수, 대적 리워야단에 대해 노하시고 그를 쳐서 멸할 것이다(27:1). 그 후 여호와는 자기 백성의 허물을 대속하고 그들의 죄악을 제거하실 것이다(27:9). 바울은 하나님의 이 약속을 일종의 언약으로 이해하여 그것을 사59:21과 결합시킨다.

 

하나님은 여전히 이스라엘과의 언약에 충실하시다. 그는 자기 포도원에 대해 노함이 없다. 물론 여호와는 자기 백성의 죄악으로 인해 그들을 치시고, 그들을 흩으실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다. 하나님께서 이방을 치셨던 것처럼 자기 백성을 치시지 않을 것이다(27:7). 만일 하나님이 이방에게 긍휼을 베푸셨다면, 그가 어찌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긍휼을 베풀지 않을 것인가?(11:31) 만일 하나님이 이방의 불순종조차 돌이켰다면 그가 어찌 자기 백성의 불순종을 돌이키지 않을 것인가?(11:32)

 

자기 백성의 불순종을 돌이킬 구원자는 바울에 따르면 다름 아닌 시온에서 나온다( 11:26). 구원자는 물론이지만 시온을 위해 올 것이다(59:20). 그러나 그 구원자는 다름 아닌 시온에서 나온다. 하나님은 그러니 시온을 떠난 적도 버린 적도 없으시다. 비록 이스라엘이 지금 복음에 불순종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시온에 계시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불순종 가운데 가두어 두는 이유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구원을 받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 수가 찰 때, 하나님은 마침내 모든 이스라엘을 돌이키실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자가 와서 돌이킬 자, 곧 하나님의 신이 그 입에 임하게 될 자는(59:21) 오직  자신의 입으로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자, 그리하여 구원하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59:11)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