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40장~66장과 이사야서의 통일성 (2002년)

 

<아래는 2002년 김정우 교수의 이사야서 수업 과제로 작성했던 보고서 내용의 일부입니다.  본래는 이사야 53장 주해를 위해 쓴 글이었는데, 6월 말까지 이어질 매일성경 이사야 묵상의 길 안내를 위해 제목을 달리하여 올립니다. 각주는 기술상의 문제로 올리지 못했습니다.>

 

1. 방법론 - 이사야서의 통일성 문제

 

    베른하르트 둠(1892) 이후 이사야서는 제 1 이사야(1-39), 제 2 이사야(40-55), 제 3 이사야(56-66)로 분리되어 이해되어 왔으나, 최근 - 차일즈의 정경적 접근을 포함하여 - 여러 학자들(R. Rendtroff; 보수주의 학자로는 J.N.Motyer, J.N.Oswalt등)에 의해 이사야서 전체의 통일성에 대한 문제가 심각하게 논의되고 있다. 물론 이사야서 전체의 통일성을 이야기한다고 해서 그것이 단일 저자를 지지한다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이사야는 두 부분 또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각기 다른 삶의 정황을 가지는 것으로 이해됨에도 불구하고 그 전체가 최종적 형태에 있어서 통일체를 이루고 있다는 것일 뿐이다.

 

    보수주의 학계는 그럼에도 이런 분위기 속에서 호기를 맞고 있다. 성경의 최종적 본문에 대한 전체적인 연구는 보수주의 학계가 늘 해왔던 것인데, 그것이 학계의 주된 연구 경향이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역사-비평적 방법이나 양식-편집 비평적 연구 방법이 사라졌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최근 독일에서 이사야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박경철 교수는 그의 이사야연구사에 대한 글에서, 최근의 이사야 연구 논의는 다음과 같은 두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 그 초점이 모아지고 있다고 개관하고 있는데, 그 물음이란 1) 최종 형태로 주어진 본문은 무엇을 말해 주는가? 2) 어떻게 이사야서는 지금의 최종의 형태로 만들어져 오게 된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 두 물음은 이사야 연구가 최종 본문에 대한 공시적 연구뿐만 아니라, 본문 형성에 대한 통시적 연구 또한 중요한 작업으로 수행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렌트로프는 최근(1991) 이사야 6장을 중심으로 이사야 전체의 구성을 추적한 한 연구에서 자신은 위 두 물음 사이에서 중도적인 방법을 추구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여기서 중도적 입장이란 본문의 형성에 대한 물음을 추구하면서도 그 최종 본문의 의미를 밝히는데 주력하는 것을 가리킨다. 렌트로프에게 있어서 확고한 기준은 어떤 연구이든 그것이 본문의 의미를 밝히도록 돕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렌트로프는 작금의 탈-역사적인  문학 비평적 연구와 차일즈의 정경적 접근을 비교하면서 후자는 최종 본문의 구성에 대한 관심을 배제하지 않으면서 최종 본문의 정경적 의미를 찾는 것으로서 전자의 접근과 구별된다고 본다. 다시 말해서 차일즈는 본문이 오랜 기간을 거쳐 형성되어온 것임을 인식하면서 ‘정경적 편집자’의 편집으로서 본문의 최종 형태에 주목하는데 반해, 문학 비평적 연구는 그러한 통시적 과정에 대한 인식 없이 역사적 맥락을 탈각 시킨 상태에서 본문을 평면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그는 비평적 연구의 성과를 쉽게 버릴 수 없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사야 연구에 있어서는 이 둘(정경적 접근과 문학비평) 사이의 구분이 렌트로프가 보듯 그렇게 나이스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1-39장의 경우 몇몇 역사적 네러티브들이 사용되어지고 있긴 하지만, 40-66장의 경우 이사야서는 역사적 맥락을 탈각시킨 상태에서 기록되어져 있기 때문이다. 40-66장의 경우 고레스(44:28;45:1)와 바벨론(43:14;47:1-18;48:14,20등)을 제외하고는 딱히 어떤 역사적 맥락 속에서 읽어야 하는가에 대한 지침이 본문에 있지 않다. 물론 40-55장은 바벨론 포로 귀환을 독려하는 것으로 가장 잘 읽혀질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40:2;43:5-6;45:20;48:20;50:11,14). 하지만 만일 차일즈의 말대로 정경적 편집자가 역사적 맥락을 고의로 탈각시켜서, 본문이 ‘종말론적인 것’으로 이해되어지길 원했다면 역사적 맥락을 찾으려는 시도는 정경의 의도를 배반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사야 연구에 있어서 우리는 역사적 맥락을 찾는 시도를 버려야 한단 말인가? 확실히 1-39장은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의 시대(8C)를 배경으로 가지고 있다. 그러나 40-66장의 경우에도 그러한가? 지금껏 많은 시도들이 있어왔지만 모두를 만족시키는 답변은 있지 않았다. 차일즈의 입장은 그런 시도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정경의 최종 본문이 그것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 시대를 배경으로 하여 읽도록 의도되었다는 말인가? 본문은 포로에서 돌아올 것을 요구하는 것으로 가득 차 있다. 본문이 가정하는 독자는 포로기의 이스라엘이 아닌가? 그렇다면 우린 포로기 상황을 본문의 삶의 정황으로 삼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만일 그래야 한다면, 본문의 형성사에 대한 연구가 필수적인 것이 아닌가?

 

    여기서 우리가 물어야할 중요한 질문은 본문의 생성 과정과 편집과정에 대한 연구가 과연 얼마나 현재 본문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가?하는 것이다. 현재 본문은 그 전체를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의 예언으로 볼 것을 요구한다. 본문엔 오직 하나의 소명기사만이 등장하며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 외에 다른 선지자 또는 선지자 집단이 본문의 저자로서 소개되어지고 있지 않다. 본문은 그 전체를 이사야의 글로 읽을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동시에 본문은 40-66장 특히 40-55장의 경우 포로기 이스라엘을 그 내재적 독자로 가지고 있는 것 으로 보인다(40:2;43:5-6;45:20;48:20;50:11,14). 다시 말해서 본문이 말을 거는 대상은 8C의 이스라엘이 아니라, 6C 또는 5C의 이스라엘인 셈이다. 이사야서를 세 부분으로 나누는 근거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반드시 이사야서를 둘 혹은 셋으로 나누어야할 이유가 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런 내재적 독자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사야서는 자신을 하나의 전체로서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의 예언으로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뿐 아니라, 이사야서는 전체를 통해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주제나 언어를 통해서도 하나의 통일체를 이루고 있다. 천지의 주권자 하나님, 여호와의 영광, 빛과 어두움, 소경과 귀머거리, 심판과 구원, 남은자와 돌아온자, 창조 모티프와 재창조, 여러 언약들, 출애굽 모티프 등 이 모든 주제들이 이사야서 전체에 걸쳐 반복적으로 그러나 조금씩 진전되면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사야서는 하나의 전체로서 자신을 이해할 것을 요구한다. 

 

    이사야서가 하나의 전체로서 통일성을 가지고 있다고 했을 때, 그 통일성은 어디에 근거를 두고 있는가? 최종 편집자에게? 아니면 저자(이사야)에게? 아니면 본문 자체에? 현재 본문의 통일성의 근거는 최종 편집자나 저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본문 자체에 있다. 역사적 이사야가 이 글들을 기록했다는 것이 본문의 통일성을 담보해 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본문 자체가 역사적 이사야를 자신의 저자로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본문의 의미를 규정하는 것 또한 ‘저자의 의도’나 ‘편집자의 의도’가 아니라 ‘작품의 의도’이다. 

 

    이것은 다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즉 ‘본문이 여러 과정을 거쳐 기록, 전승, 수집, 편집되었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본문 자체를 통해서는 그 과정을 명확히 알 수 없으므로 본문의 형성에 대한 문제를 논의하기보다는 본문의 현재 형태에 대한 연구가 현재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연구이다’.

 

    본문에 대한 편집 비평적 접근의 전제는 증명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커다란 가정일 뿐이다. 그리고 그 가정은 사실이지 본문 자체를 통해 지지 받고 있는 것이 아니다. 본문이 편집되었다는 것은 다수의 저자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럴 때에 본문의 통일성은 다수의 저자들과 편집자들의 신학적 통일성에서 찾아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신학적 통일성은 오직 본문 자체를 통해서만 산출된다. 결국 최종적으로 본문의 통일성을 담보하는 것은 편집자들의 신학적 통일성이 아니라 본문의 신학적 통일성이다. 이렇게 되면 편집자들이 사라지는 결과를 낳게 된다. 편집비평은 그 자체 내에 서로를 소거하는 두 항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본문들이 조각들로 이해되어야 편집비평이 가능하다. 하지만 편집비평이 너무나 완벽하게 이루어지면 조각들은 하나의 전체 안으로 융합되어 사라지고 만다. 결국 편집비평은 자신의 작업 근거를 소거시켜 버리는 것이다.

 

    따라서 문제는 먼저 본문이 과연 어떤 차원에서 통일성을 가지고 있는가?를 연구하는 것이다. 이사야서의 신학적 주제나 용어의 통일성뿐만 아니라, 각 장들이 서로를 어떻게 지지하며 의존하고 있는지에 대한 구조적 통일성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져야 하고, 또한 본문 전체를 이사야의 예언으로 읽을 때 40-66장이 어떻게 일관되게 이해되어 질 수 있는가를 탐구해야 하는 것이다.  

 

2.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의 글로서 40-66장.

 

    우리가 귀 기울여 들어야 할 것은 본문의 자기 증거이다. 본인은 전통적 입장인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의 단일 저자설을 받아들인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본문이 그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본인은 40-55장의 내재적 독자가 포로기의 이스라엘임을 받아들인다. 그 이유도 간단하다. 본문이 그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무슨 모순이 있는가? 40-55장은 1-39장을 전제하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다.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갇힌 자 포로 된 자들을 해방하시고 그들로 시온으로 돌아오게 하여 열방의 빛으로 살도록 이끄실 것이라는 40-55장의 선포는 1-39장의 이스라엘의 범죄와 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예언 없이는 제대로 이해될 수 없다. 40-55장은 1-39장의 결과이다. 그런데 그 결과는 하나님의 심판이 아닌 회복으로 그려진다. 1-39장은 이미 바벨론 포로를 예언하고 있으며 거기서 남은 자들이 시온으로 돌아올 것을 내다보고 있다(6장). 40-55장 또는 40-66장은 1-39장이 이미 내비친 전망이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1-66장 전부는 이스라엘이 시온에서 열방의 빛이 되어 만민에게 여호와의 토라를 가르치며 그들과 함께 여호와를 섬기는 대망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그러나 1-39장에서 보듯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 범죄함으로 열방의 빛이 아니라 열방의 조롱거리가 될 것이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40-66장이 보여주듯 그러한 이스라엘을 ‘여호와의 종’의 사역을 통하여 회복시키고, 시온을 하나님의 율법이 만방으로 흘러가게 하는 여호와의 처소로 만들 것이다.    

 

    이사야서 전체는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의 글로 읽을 때 제대로 읽혀진다. 40-55장의 내재적 독자의 문제는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다. 이사야는 40-55장에서 1-39장에서 예상되어지는 바벨론 포로기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사야서는 1-39장을 따로 읽고 40-55장을 따로 읽도록 요구되지 않는다. 이사야서는 1-66장 전체를 함께 읽을 것을 요구한다. 이사야가 28장 또는 29장을 따로 백성들에게 선포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역사적 이사야가 역사적 대상을 향해 단편적인 예언을 발하는 것을 상정하고 본문을 이해하려 한다면, 그것은 정당하지 못한 것이다. 이사야서는 하나의 전체로서 읽혀져야 한다. 왜냐하면 이사야서는 자신이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무엇을 선포했었는지를 기록해 둔 비망록이 아니기 때문이다. 때문에 8C의 이사야가 8C의 독자들을 향해 포로에서 돌아오라고 외치는 상황을 가정할 필요가 없어진다. 만일 40-55장의 선포 중 어느 하나를 독립적으로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외쳤다고 가정한다면, 그 때 그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되고, 결국 제 2 이사야를 상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이사야의 예언이 단순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비망록적 기술이 아니라면, 다시 말해서 이사야 전체가 하나의 완결된 메시지로서 선포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면, 40-55장은 1-39장의 선포를 이미 받아들인 누구에게나 의미 있는 것으로 수용될 수 있는 것이 된다. 

 

    따라서 40-55장의 내재적 독자가 포로기 이스라엘이라 하여, 40-55장이 그 당시에 형성된 것이라고 보아야 하는 것이 아니다. 40-55장의 메세지는 포로기의 복역기간이 끝나고(40:2), 고난의 풀무를(48:10) 거친 자들에게 선포되어지는 것이지만, 이스라엘은 1-39장과 같이 여전히 죄로 가득한 백성들로 그려진다(40:27;43:22-24;48:4;57:14-21). 하나님의 심판의 매를 맞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cf1:2-17). 하지만 이제 전혀 새로운 일을 하나님께서 행하실 것이다. 그들은 여전히 소경이요 귀머거리이지만(42:19), 여호와께서 그들을 고치실 것이다(42:16). 여호와의 종이 그들을 고치고 인도할 것이다(42:7). 소경이 눈을 뜨고(42:7), 귀머거리가 듣고, 벙어리가 노래하고, 광야에서 물이(49:19), 사막에서 샘물이 솟을 것이다(41:18);. 광야에 대로가 있어, 구속함을 입은 자들이 노래하며 시온으로 돌아와, 영영한 희락과 기쁨을 누릴 것이다(51:11). 그런데 이는 35장에서 이미 선포되었던 것이다. 1-39장과 40-66장의 독자들과 그들에게 주어진 약속은 그러므로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40-55장의 내재적 독자가 포로기 이스라엘인 것은, 1-39장에서 이미 주어진 약속이 그들에게 적용되어지기 때문이다. 돌아와야 한다면, 포로로 있어야 한다. 그러나 1-66장 전체의 독자들은 근본적으로 동일한 자들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길을 따라 여호와를 떠나 우상을 섬기며 공평과 의를 버린 자들이다.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 있으면서도 하나님께 돌아와 고침을 받지 못하고 있는 자들이다. 그들은 결국 포로로 끌려갈 것이다. 그러나 거기서 그들은 여호와께서 천지간에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이심을 보게 될 것이다.

 

    만일 이사야 전체가 통일적인 작품이라면 그것이 그려내는 세계는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연속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될 때에 이사야는 제대로 된 목소리를 낼 수 있다. 그럴 때 그것은 8C 독자 뿐 아니라, 6C 독자에게도, 그리고 21C 독자에게도 유의미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3. 여호와의 종 - 이스라엘의 치료자.

 

    일반적으로 ‘종의 노래’는 42:1-4; 49:1-6; 50:4-9; 52:13-53:12 이렇게 4개의 문단에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본문에 나타난 종이 누구냐에 대한 많은 논의들이 있어왔다. 이스라엘 또는 역사적인 한 인물(모세, 이사야, 제2이사야, 스룹바벨 등), 또는 메시야적 존재, 또는 남은 자들의 집단적 대표 등 다양한 의견들이 개진되어 왔다. 사실 40-55장에는 이 종의 노래들 말고도 종에 대해 언급하는 많은 구절들이 산포 되어 있는데(41:8-16;42:18- 19;44:1-5,21;45:4; cf.56:6;65:9,13-16), 여기서 종은 이스라엘 백성이다.

 

    그렇다면 4개의 종의 노래에서 등장하는 종 또한 이스라엘 백성인가? 그렇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종은 단수로 쓰이고 있고, 네 번째 종의 노래의 경우, 그의 태어나서 살고 심판 받아 죽어 장사지내지는 (그리고 다시 일으켜지는) 과정이 분명히 나타나며 이는 한 개인의 삶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호와의 종은 어떤 한 개인인 셈이다.

 

    그런데 종의 노래에 등장하는 여호와와 종과 여전히 하나님의 종으로서 불려지는 이스라엘 사이에는 유사점과 동시에 차이점이 존재한다. 양자는 모두 하나님에게 ‘선택된 자’이며(41:8f;44:1f; 42:1;49:7 비교하라), 양자가 다 ‘어머니의 태내에서 조성되어’(44:2;49:5), 보호를 받고(49:6;42:6;49:8), ‘떠받침을 받고’(41:10;42:1), ‘존귀하게 여김을 받고’(43:4; 49:5),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것(44:23;49:3)이다. 하나님의 신이 이 양자에게 다 주어진다(44:3; 42:1). 그러나 여호와의 종으로서 이스라엘은 소경이며 귀머거리이고(42:19), 탈취를 당하며(42:22), 하나님에 의해 도말 되어야할 허물과 죄를 지고 있으며(44:22), 완악하며(48:4), 궤휼하고(48:8), 모태에서부터 패역한 자라 칭함을 받는다(48:8). 이런 자들이 어떻게 여호와의 종일 수 있는가? 이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단 말인가?

 

    이스라엘 안에는 이렇듯 모순되는 두 가지 성격이 공존한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이스라엘이면서, 동시에 소경이며 고침 받아야할 죄와 허물을 진 백성이다. 이러한 이스라엘과 ‘종의 노래’에 나오는 여호와의 종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두 번째 종의 노래(49:1-6)는 이스라엘과 여호와의 종 사이의 관계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여기에는 두 종류의 종이 등장 한다. 1-4절의 종은 이스라엘이며 5-6절은 여호와의 종이다. 앞 선 종은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이스라엘이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이를 성취하지 못하고 실패한다. 그는 헛되이 수고할 뿐이다(49:4). 그런데 이 때,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부름 받은 또 다른 종이 등장한다. 그 종은 이스라엘로 여호와께 돌아오게 하기 위해 선택되었다(49:5). 그는 이스라엘을 일으켜 그 남은 자를 돌아오게 할 것이며(49:6), ‘이방의 빛’이 되어 여호와의 구원을 땅 끝까지 이르게 할 것이다(49:6).

 

    첫 번째 종의 노래(42:1-4)에서 그 종은 이방과 세상에 공의를 베풀 자로 소개된다(이는 ‘이방의 빛’의 다른 표현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런데 첫 번째 종의 노래에 이어서 ‘너’라 불리는 자가 등장하는데(42:5-7), 그는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될 자로 소개된다(42:6). 또한 그는 소경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해방시킬 것이다(42:7). 종의 노래에 이어서 등장하는 ‘너’는 첫 번째 종의 노래에서 등장한 ‘종’과 동일한 자로 보여 진다. 그리고 이 문단에서 소경과 갇힌 자는 다름 아닌 이스라엘이다. 그런데 두 번째 종의 노래(49:5-6)에서 등장하는 여호와의 종은 그 이스라엘을 회복시켜 여호와께 돌아오게 할 자로 소개되고 있다. 그리고 42장의 ‘너’와 49장의 ‘종’은 모두 ‘이방의 빛’으로 부름 받고 있다. 결국 ‘여호와의 종’은 패역한 이스라엘을 고쳐 그들로 참된 하나님의 종이 되게 하는 자이며 또한 이방의 빛으로서 그 사명을 감당할 자인 것이다.

 

    ‘하나님의 종’으로서 그 역할을 제대로 해 내지 못하고 있는 이스라엘은 소경과 귀머거리로 불려지고 있다. 그런데 소경과 귀머거리라는 이미지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도 깨닫지도 못하는 백성들의 상태를 나타내는 것으로, 그것은 그들의 죄와 허물의 이유이며 동시에 그 결과이다. 그런데 첫 번째 종의 노래에 이어서 나오는 한 ‘종’은 소경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해방할 자(42:7)로 소개되고 있다. 따라서 여호와의 종은 이스라엘의 소경된 상태를 고치는 것을 통해 그들을 회복하여 여호와께로 돌릴 자로서의 사명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이사야서에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한다는 것은 ‘죄와 허물을 제거하고, 패역한 마음을 고치는 것’을 가리키는 이미지이다.

 

    소경됨과 귀멂은 이스라엘의 죄와 허물, 맞아도 깨닫지 못함, 패역함 등의 개념들과 자주 같이 사용되는 이미지이다. 29:9-14에서는 소경됨과 ‘마음이 떠남’이 같이 언급되며, 35:5-10에서는 눈이 열려 시온으로 돌아오는 자는 구속함과 속량함을 입어 깨끗하게 된 자들로 소개되며, 42:18-22에서 이스라엘은 소경이기에 탈취를 당하고 옥에 갇히는데, 43:25-28에서는 그들의 허물 때문에 비방거리가 된다, 즉 포로로 끌려가게 된다. 결국 이사야에서 소경됨과 귀멂은 죄와 허물, 깨닫지 못한, 패역한 마음 등을 나타내는 이미지이며, 눈과 귀를 연다는 것은 결국 그들로 하나님의 말씀과 자신들의 실상을 깨닫게 한다는 것이며, 또한 그들의 죄와 허물을 제거하고 그들의 패역한 마음을 고친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경의 눈을 밝히는 일은 그들의 죄를 제거하고 그들의 패역을 치유하는 일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여호와의 종’이 이스라엘을 회복시켜 여호와께 돌아오게 하는 방식은 그들의 ‘죄’를 ‘제거’하고, 그들의 패역을 ‘치유’하는 방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문제는 “‘여호와의 종’은 어떻게 이스라엘의 죄를 제거하고, 그 패역을 치유하는가?”일 것이다.

 

    세 번째 종의 노래(50:4-9)는 이스라엘의 회복과 여호와의 종의 고난 받음이 관계가 있음을 암시한다. 거기서 그는 여호와께서 자신에게 백성의 귀와 눈을 열 수 있는 학자(제자)의 혀와 깨닫는 귀를 주셨다고 말한다(50:4). 그런데 그의 고난당함은 바로 이 깨달음의 결과로 수행된다. 그가 고난에 자기 뺨과 등을 맡긴 것은 여호와께서 그의 귀를 열어 깨닫게 하셨기 때문이다(50:5). 세 번째 종의 노래에서 백성의 눈을 열고 귀를 여는 일, 즉 그들의 죄와 패역을 제거하는 일은 종의 고난과 관련된 것임이 드러난다.  

 

    이 관련이 극명히 드러나고 있는 것이 바로 네 번째 종의 노래(51:13-53:12)이다. 그는 많은 사람의 허물과 죄악을 대신 지고 죽임을 당한다. 그의 고난과 죽음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평화와 치유함을 얻으며, 죄악이 제거되고 의로움을 얻게 된다. 이 네 번째 종의 노래에서 여호와의 종으로 불려졌으나, 소경 되고, 귀멀었으며, 완악하고 궤휼하고 패역하며, 허물과 죄를 진 이스라엘이 어떻게 치유함을 입게 되는지, 그들이 어떻게 여호와의 영광을 나타낼 하나님의 종이 될 수 있는지가 해명된다.- 그 종은 대속적 죽음을 통하여 이 일을 이룰 것이다.

 

    이렇게 40-55장은 여호와의 종으로서 이스라엘의 양면적 모습을 드러내는 문단들과 이스라엘의 치료자로서 여호와의 종을 소개하는 문단들을 중심으로 서로 톱니바퀴처럼 얽혀있다. 51-55장은 네 번째 종의 노래를 앞뒤로 감싸면서 시온의 회복에 대한 기대와 흥분으로 가득 차있다. 51-55장은 일종의 정경 속의 정경이라 할 수 있을 만큼, 성경의 모든 언약과 주제들이 총 망라되어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이 모든 기대들은 여호와의 종의 수난과 죽음을 통해서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