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더는 '이것'이 아닐 때 (겔 21장 18절-27절)

 

바벨론 왕이 암몬과 유다 중 어디를 먼저 칠 것인가를 놓고 점을 칠 때, 점괘는 모두 유다를 가리킬 것이다(22). 화살점, 드라빔을 통한 점, 간을 보고 치는 점, 세 가지 모두에서 유다와 예루살렘이 선택될 것이다(21). 예루살렘 거민은 유다와 바벨론이 맹세로 맺어진 관계이므로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칠 것이라 생각지 않을 것이나(23), 점괘는 일치하게 예루살렘을 가리킬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 자신이 먼저 맹세를 어기고 바벨론을 배반하였기 때문이다(24).

바벨론과 시드기야의 유다의 관계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과의 관계와 평행된다. 맹세를 통해 충성과 돌봄을 약속하였으나, 유다와 이스라엘의 배반과 배신으로 인해 계약은 파기되었다. 본인들이 언약에 충실하지 않고 다른 신과 다른 나라를 의지처로 삼으면서도 ‘우리는 엄중한 맹세로 맹약하였으니 (그에게서) 버려지지 않을 것‘이라는 심리로 스스로의 눈을 가렸다. 자신이 먼저 상대에게서 등을 돌렸음에도 상대방의 신의는 지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멸망의 때가 올 때, 언약을 배반한 자가 바로 자신이었음이 드러날 것이다(24).

스스로 부정을 저지르고 신의를 저버리면서도 상대방은 내게 신의를 지키고 의롭게 대해야 한다는 생각은 어처구니가 없지만 그러나 인간의 인식은 그렇게 일방적이다. 사람은 거울을 통해서가 아니라면 자기 모습을 보지 못한다. 자신의 얼굴을 자기가 가장 잘 알고 있다 생각하지만 자기 얼굴을 직접 본 사람은 아무도 없고, 자신의 뒷모습을 본 사람도 없다. 스스로에 대해 눈 감고 있으면서도 타인의 얼굴과 뒷모습, 그들의 행위를 잘 보고 있다 여긴다. 그러나 자신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타인도 제대로 보지 못한다. ‘엄숙한 맹세로 맹약하고도, 맹세를 깨고, 내게서 등을 돌렸다‘고 원망하지만, 맹약을 깨뜨린 것은 그가 아니라 자신이고, 등을 돌려 관계를 깨뜨린 것도 자기 자신이다.

지금껏 당연하다 생각했던 ‘왜곡되고 뒤틀린 나의 왕국‘이 무너질 날이 온다(25). 내게 높았던 것이 낮아지고, 내게 낮았던 것이 높아질 것이다(26). (지금껏 내가 알고 있던) ‘이것‘이 ‘이것‘이 아니라는 사실 앞에 당혹스러워 할 날이 올 것이다(27). 그 ‘사실‘ 앞에 맞닥뜨림은 물론 당혹스럽고 고통스럽겠으나, 공평과 정의로 다스리는 분과의 만남일 것이기에(28), 두려움 속에서도, 소망을 품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