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6장 – 이스마엘 (창16:1-16)

아브람이 85세가 되었을 때, 곧 그가 가나안 땅에서 살기 시작한지 10년이 되었을 때였다. 10년이 지나도록 아브람에겐 아들이 없었다. 이것은 물론 아브람에게도 고통스럽고, 걱정되는 상황이었지만, 사래에겐 더욱 더 고통스러운 상황이었다. 하나님은 분명히, 아브람의 몸에서 날 자가 아브람의 모든 것을 상속받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고, 또 맹세까지 하셨다. 하지만 10년이 지나도 여전히 자식이 없었다.

이 상황에서 누가 가장 괴롭겠는가? 사래다. 여자로서, 한 집안의 안주인으로서, 자녀를 낳아 그 대를 잇는 것은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그런데 없었다. 괴로워하던 사래가 드디어 결심을 한다. 자기 나이 75세, 아브람은 85세, 아브람이 더 늙기 전에 해결을 ...해야 했다. 그래서 애굽 여종 하갈을 아브람에게 준다. 이 한 결정과 이 한 행동으로 인해 16장의 모든 문제와 갈등이 발생한다.

창 16장의 핵심과 관심은 아브람의 신앙의 타락이나, 실패에 있지 않다. 그 보다, 사래와 하갈 사이에 벌어진 일과, 그로 인해 발생한 일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바라보시며, 어떻게 그 사이의 문제와 갈등을 해결하시는가에 놓여 있다. 구원사의 큰 물줄기가 흘러가고 있는 창세기의 아브람의 이야기에서, 16장은 놀랍게도 여인들의 마음의 갈등과 고통과 상처에 집중한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바라보시며, 어떻게 봉합하는지를 보여준다.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아브람? 사래? 하갈?
1-3절까지, 등장인물은 아브람과 사래다. 3-6절까지 등장인물은 아브람과 사래와 하갈이다. 하지만, 1-6절의 주요 인물, 모든 사건을 이끌고 있는 인물은 사래다. 그리고 7-16절까지의 중심 인물은 하갈이다. 사래와 하갈, 이 두 여인의 이야기가 하나님께서 온 인류의 구원을 어떻게 이룰 것인가에 대한 중요한 대답을 보여주고 있다.

약속을 받은 지 10년,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로서 사래의 고통은 날이 갈수록 해가 갈수록 깊어져 갔다.
그래서 자기 여종을 들이고자 한다. 그것을 통해서 그녀가 꿈꾼 것은 무엇인가?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생산을 허락지 아니하셨으니 원컨대 나의 여종과 동침하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내가 세워질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창 16:2)

히브리어 성경은 “내가 그녀로 말미암아 세워질 것이다“이다. 즉 사래는 하갈을 아브람에게 주는 것을 통해, 혹 그녀가 자녀를 얻게 된다면, 그로 인해 자기가 세워질 수 있을 것이라고, 자기 수치가 없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소망이 있었기에, 사래는 참으로 쉽지 않은 결심을 하게 되었고, 그것을 어렵사리 행동에 옮기고 있다.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그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가져 그 남편 아브람에게 첩으로 준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한지 십 년 후이었더라』(창 16:3)

히브리어 성경은 이것을 우리 성경과 는 다른 울림을 갖게 쓰고 있다.
“그리고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애굽 여인, 그녀의 여종 하갈을 취했다.
  십년이 지났었다,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한지.
  그녀가 그녀를 그녀의 남편 아브람에게, 그에게, 아내로 주었다.“

성경은 가나안에 거한지 10년 후 아브람이 결국 믿음을 못 지키고 하갈을 취했다는 투로 이 사건을 기록하고 있지 않다. 성경은 십년이 지나도록 자녀가 없었던 사래가, 아브람의 아내가, 자기 여종을 아브람에 내어 주면서 겪고 있는 고통을 보여주고 싶어한다. 아브람의 아내가 여종을 취해, 그녀를, 그녀가, 그녀의 남편, 아브람에게, 그에게, 아내로 주었다.

우리 성경엔 ‘첩‘으로 주었다고 번역했지만, 그냥 ‘아내‘다. 아브람의 ‘아내‘가 자기 남편에게, 아브람에게, 그에게, 그녀를 ‘아내‘로 주었다는 것이다. 여자들은 알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그런데 사래는 이 고통을 스스로 선택하고 있다. 사래는 그보다 더 큰 고통 가운데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기가 아이를 낳지 못하는 고통이다. 더 이상 이 고통을 견딜 수가 없다. 그러니, 차라리, 내 여종을 취해 자녀를 낳아라!

자기 아내의 번민과 고통을 알았는지, 몰랐는지, 아브람은 그 말에 순종한다. 그리고 하갈이 임신한다. 그러자 문제가 발생한다.

사래가 바랬던 것은 무엇인가? 하갈이 임신을 하는 것이다. 여종이 낳은 자식은 곧 그 주인의 자식이다. 야곱에게 레아와 라헬이 있었고, 그녀들에게 실바와 빌하라는 여종이 있어 자식을 낳았다. 그 자식들은 곧 레아와 라헬의 자식들인 것이다. 그런데 사래가 그토록 바랬던 일이 일어났는데, 그런데 문제가 생긴 것이다.

막상 하갈이 아이를 갖자, 사래가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하여, 사래의 불행이,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여인이라는 운명이 더 분명하게 부각된 것이다.

하갈이 임신하기까지는 아무도 이 사실을 자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하갈이 정말로 임신을 하자, 상대적으로 10년동안이나 아이를 가지지 못했던 사래가 불임의 여성이라는 것이 더욱 더 분명하게 확인이 된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비참한 깨달음이다.

물론 사래는 그런 자기 상황을 받아 들이고, 마음을 추스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 나는 불임의 여성이다. 하나님이 내가 자녀를 갖는 것을 막으셨다. 하지만, 하갈을 통해 낳은 자는 내 자식이고, 나는 그의 어머니다. 그는 아브람의 씨가 아니냐?. 그래 내가 하갈을 아브람에게 주어 아이를 가진 것이다. 내가 아브람의 씨를 잇게 한 것이다.“

하지만, 이는 여인으로서 참으로 깊은 허전함과 막연한 불안을 만들어 내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겨우 마음을 추스르는데 하갈이 자기 마음을 긁는 것이다.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잉태하매 그가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그 여주인을 멸시한지라』(창 16:4)

우리 성경엔 멸시한다고 했는데, 이는 좀 강한 표현으로 보인다. 멸시까지는 아니고, 무시 정도가 맞다. 임신하자 하갈의 눈에 사래가, 그녀의 여주인이 하찮게 보였다.

그런데 이런 하갈의 눈을, 생각을 못 읽을 사래가 아니었다. 그리고는 분노하고, 그리고는 괴로워한다.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나의 받는 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가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창 16:5)

내가 받는 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다. 내가 당하는 이 폭력적인 일은 당신 책임이다. 내 여종이 나를 멸시한다. 그런데 히브리 성경은 이를 아주 예리하게 표현한다. “그녀가 나를 멸시한다. 하찮게 여긴다“라고 쓰지 않고, “내가 그녀의 눈에 하찮은 존재로 보여졌다. 내가 그녀의 눈에 무시할 만한 존재가 되었다.“라고 쓰고 있다. “그녀가 나를 무시한다“가 아니라, “내가 하갈의 눈에 별볼일 없는 여자로 여겨질 것이다“라는 것이다.

실지로 하갈이 대놓고 무시했으리라 생각되진 않는다. 그런데 사래 스스로가 생각하는 것이다. 저년이 나를 무시하는 구나! 저년이 나를 애도 못 낳는 여자라고 생각하고 나를 같잖게 여기는 구나!

누가 생각한다고? 하갈이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래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하갈도 그렇게 생각하였을 것이다. “결국 자식도 못 낳는 여자였구먼“
그렇게 생각하면,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그것이 나타난다. 더구나 예민할 대로 예민해져 있는 사래가 이것을 알아채지 못했겠는가? 설사 하갈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더라도, 사래는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내가 저년 눈에 하찮게 보이겠지“

사래의 이 하소연에 대해, 사래의 마음을 전혀 헤아리지 못하고, 하갈에게 들어갔던 아브람은, 이번에도 사래의 마음을 전혀 헤아리지 못하고는 말한다. “당신 여종이니, 당신 눈에 좋은 대로 하시오“

사래가 기대했던 아브람의 대답은 그것이었을까? 아니었을 것이다. 물론 아브람도 아내에 대해 최대한 그 마음을 나름 헤아리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래의 고통을 안다. 그녀가 하갈을 주었고, 하갈이 임신했다. 자기가 하갈을 편들거나, 그 자녀를 생각해서 참으시오. 라고 말하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당신 원하는 대로 하시오! 라고 말하고 있었을 것이다.

남편에게 위로 받지 못한 사래는 하갈을 학대한다.
『아브람이 사래에게 이르되 그대의 여종은 그대의 수중에 있으니 그대의 눈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였더니 하갈이 사래의 앞에서 도망하였더라』(창 16:6)

사래가 하갈을 학대한다. 근데 여기서도 학대는 좀 강한 표현이다.
‘아나‘라는 히브리 단어인데 억압하다, 괴롭게 하다, 혹독하게 하다, 낮추다 라는 뜻이다.

일을 더 심하게 부려먹었다기 보다는 ‘너는 종에 불과하다‘라는 것을 각인시키는 것이다. 그러자, 하갈이 도망한다.
왜 도망했겠는가? 사래가 자기를 너무 심하게 부려먹어서, 힘들어서 견딜 수가 없었는가? 아닐 것이다. 그런 것 때문이 아닐 것이다.

자기에게 어떤 권리가 없다고 생각할 때, 불만은 발생하지 않는다.
자기에게 어떤 권리가 있다고 생각할 때, 불만이 발생한다.

종으로 있을 때에는 사래가 시키는 일들을 하는 것이 불만을 만들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비록 여전히 종이지만, 지금 자기는 임신 중이고, 더구나 아브람의 씨를 배고 있다. 자기가 존중 받을 만한 상황에 있다. 그런 권리가 있다. 마땅히 존중 받아야 한다. 그런데 사래는 와서 “너는 종이고, 나는 주인이다“를 끊임없이 확인시키며, 이런 저런 일들을 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불만을 만들고, 억울해지는 것이다. 억울함이다.

억울함은 두 가지 근원에서 발생한다.
1) 자기 자신의 권리가 침해 받고 있다고 생각 할 때
2) 상대방이 그렇게 할 권리가 없다고 느껴질 때

사람들 사이의 문제들과 갈등들은 여기서 발생한다. 이 두 가지 생각이 사람을 긁어댈 때, 갈등은 촉발된다.

1) “내가 누군데, 내가 누군지 알아?“
2) “네가 뭔데? 네가 뭔데 그러는 거야?“

하갈도 이 생각이고, 사래도 이 생각이다.
하갈은 (1) “내가 누군데, 내가 아브람의 씨를 밴 여잔데, 내가 아니면 너는 자녀도 없이 있었을 텐데…“ 와
             (2) “네가 뭔데? 여주인이면 다야? 여주인이면 여주인답게 자녀를 낳아야지, 불모의 여자, 불임의 여자가 당신 아니야?“

그러나 이 생각은 사래도 똑같다.
       1) “내가 누군데, 내가 아브람의 조강지처야“와 또한
       2) “네가 뭔데 나한테 이래? 나를 무시해? 너는 종이라구, 종!!!!“

누가 옳은가? 누가 정당한가? 둘 다 옳다. 둘 다 정당하다. 그렇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다.

도대체 왜 이런 갈등이 생겼는가? 사래의 결정 때문이었다. 사래는 왜 이런 결정을 했는가? 아브람의 대를 이어야 한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뿐이었을까? “이로 인하여 내가 세워질 것이다“는 말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그녀는 더 이상 자기의 수치를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물론 아브람의 자손을 잇게 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한 행동이지만, 또한 그 내면에는 자기가 세워지기를 바라는, 자기 수치를 지우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누가 그런 마음을 품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서로가 정당한, 누구도 무릎 꿇을 수 없는 이 상황 속에서, 너무도 심하게 헝클어져 도저히 상황이 풀릴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그 때에, 결국 하갈이 도망한다. 문제를 해결하는 선택을 한 것이 아니라, 피하는 선택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렇게 하여 피해질 것인가? 해결될 것인가?

그럴 수 없다. 하갈의 배에는 아브람의 씨가 자라고 있다. 그 아이의 아버지는 어쨌든 아브람이고, 사래는 어쨌든 엄마로서의 권리가 있다. 해결이 아니다. 그러나 하갈은 견딜 수가 없었다. 아침마다 도끼눈을 뜨고 노려보는 사래가 견딜 수가 없었다. 사실 그건 사래도 마찬가지였다. 아침마다 불러오는 배를 내밀며, ‚아이고 힘들어‘ 하는 하갈을 견딜 수가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갈등은 격화되었다. 결국 하갈이 견디지 못하고 도망한다.

그런데 이 때, 참으로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전혀 기대도 상상도 하지 못했던 사건이 전개된다.
『[7] 여호와의 사자가 광야의 샘 곁 곧 술 길 샘물 곁에서 그를 만나 [8] 가로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가로되 나는 나의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창 16:7-8)

여호와의 사자가 하갈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샘곁에서.... 그녀를 만나주고 있다. 술 길 샘물이다. 바로, 애굽으로 내려가는 길이다.

여호와의 사자가 묻는다.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하나님이 범죄한 아담에게 던졌던 물음이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사람아, 네가 어디 있느냐?“ “너는 누구냐?“라는 물음이었다.
“너는 누구냐? 너는 누구이기에 거기 숨어 있느냐?“

여호와의 사자는 지금 동일한 물음을 묻고 있는 것이다. “너는 누구냐?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느냐?“
그 답은 무엇인가? “사래의 여종 하갈아!“가 답이다. “너는 사래의 여종이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느냐?“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합니다.“
그녀의 대답엔 그러나 “어디로“에 대한 답이 없다.

모든 도망의 특징이다. 어디로가 있다면 그건 더 이상 도망이 아니다. 그건 모험이고, 여행이고, 도전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어디로 없이, 어디에서부터의 도망뿐인 선택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도망해서 어디로 갈 것인가? 애굽으로? 거기에 뭐가 기다리고 있겠는가? 거기에 행복이 있는가?
그렇다는 어떤 보장도 없다. 하지만 괴롭다. 그러니 도망하는 것이다.

그 하갈에게 여호와의 사자가 신적인 권위로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말해준다.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창 16:9)

“네 여주인이게 돌아가라! 그리고 그 손 아래 복종하라“ - 복종하라는 단어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사래가 하갈을 낮추고자 그녀를 억압했다. 그런데, 여호와의 사자는 하갈에게 돌아가서 사래의 손아래에 스스로를 낮추라고 한다.
사래가 너에게 대하는 그 모든 것에 대해 너 스스로 그 아랫자리에 서라는 것이다.

이게 가능할까? 가능하다.
왜냐하면 하갈은 참으로 사래의 여종이기 때문이다.
“너는 누구냐?“ “나는 사래의 여종입니다.“
“그럼 사래는 누구냐?“ “사래는 나의 여주인입니다.“

모든 갈등은 두 근원에서 나온다고 했다.
1) 내가 누군지 알고 그래? 와 2) 너는 뭔데? 였다.

이 물음에 대한 이전의 하갈의 대답은
(1) “내가 단지 여종인지 알아?“와 (2) “네가 여주인이야?“ 였다.

그런데 지금 여호와의 사자는 이 두 물음에 답을 준다.
(1)“하갈, 너는 여종이다.“ (2) “사래, 그녀는 너의 여주인이다.“

맞다, 사래는 지금 정말 히스테리를 부리고 있는 중이다. 그녀가 참으로 여주인이라면, 여종인 하갈에게 이렇게 대해서는 안 된다. 
맞다. 하지만 그 말이 뜻하는 바는 사래 또한 상처에 대한 치유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여호와의 사자는 하갈을 만나 그녀를 만져주고, 치유해 주고 있다.
왜 사래가 아닌 하갈인가? 그녀가 보다 약한 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약속을 준다. “네 아들은 이스마엘이다. 그가 무수히 번성할 것이다. 들나귀 같을 것이다. 아무도 그를 길들일 수 없을 것이다. 그는 번성할 것이다. 그 씨가 수도 없이 많을 것이다. 그의 이름은 이스마엘이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기 때문이다.“

이것이 여호와의 사자가 하갈에게 주신 최종적인 대답이다.
“이스마엘“ – 하나님, 그가 들으실 것이다.

나를 감찰하시는 하나님, 나를 보시는 하나님, 나를 아시는 하나님, 내가 고통 받았음을 알고, 들으시는 하나님....
는 내 고통을 들으셨고, 앞으로도 들으실 것이다. 이스마엘!!

그런데 하나님의 이 치유는 바로 사래에게도 필요한 것이었다.
만일 사래가 하갈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을 알았다면, 그랬다면, 이 모든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을 수 있었다.

사래의 수치스러움. 10년이 지나도록 아이를 낳지 못하는 생명이 없는 죽은 여자!
그 고통의 세월, 무수히 눈물로 보냈던 날들! 그 수치를 걷고, 자기를 세우고 싶었던 사래!

그러나 하나님은 오늘 16장에서 도망하는 하갈에게, 이스마엘, 곧 하나님이 네 고통을 아시고 들으셨다는 말씀으로 찾아오심으로
사래에게도 말씀하고 싶으신 것이다.

"사래야, 내가 네 고통을 알고, 네 고통의 소리를 들었노라!"

무엇이 옳고 그르냐 이전에, 누가 맞고 틀리다 이전에,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을 아시고, 그 고통을 들으시며,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분이시다.
창16장의 여인들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고 싶으신 말씀이다.


- 2009년 12월 6일 설교 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