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5신뢰와 의로움 ( 15:1-21)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6)


1)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었다‘.


여기서믿었다는 것은 하나님과 그 약속을신뢰했다는 것이다. 15장의 믿음은 충성이나 신실함이 아닌 (cf.시락44:20;마카베상2:52), 하나님에 대한 신뢰로서의 믿음이다. 아이들은 아직 부모에게 신실하다거나 충성되다 할 수 없지만, 그러나 부모를 신뢰한다. 이 신뢰가 아이들에게 쌓이게 된 것은 아이들이 남달리 믿음이 좋아서라거나 부모를 믿어야 한다고 교육을 받아서가 아니라 부모의 양육을 받으며 부모와 함께 살아온 결과로 그들 안에 생겨난 것이다.


아브람이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게 된 것 또한 마찬가지다. 하루 아침에 신뢰가 생겨난 것이 아니라 시간을 통과하며 하나님과 함께 살아온 결과로 그 안에 생겨난 것이 그의 믿음이다. 아브람의 하나님 신뢰도 아브람의 남다른 믿음이나 열심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돌봄과 간섭 속에 지나온 세월과 그 세월만큼 겪어 알게 된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낳은 것이다. 믿음은 그러니 아브람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찾아오심과 돌봄과 간섭과 사랑의 결과로 그와 하나님 사이에 자리하게 된 선물 같은 것이다.


믿음은 한 번의 행위가 아니라 함께 겪고 살아온 삶의 과정 속에 담겨 그 만큼 자라고 깊어진다. 바울은 로마서 4장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설명하면서 창세기 15장뿐만 아니라 창세기 17, 나아가 100세가 되었을 때의 아브라함의 믿음까지 포함하여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는 구절을 설명한다(4:3,9,22). 믿음은 내 안에 있는 어떤 관념의 체계나 교리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겪어 알게 된 인격에 대한 신뢰로서 그와 살아온 삶과 그와 살아갈 삶 가운데 작동하고 자라간다.


15장에서의 믿음은 아직 창22장의 이삭을 바치는 하나님에 대한 충성과 신실함은 아니다. 그러나 창22장의 절대적 순종은 창12장부터 22장에 이르기까지 아브라함이 겪어온 하나님, 겪어 알게 된 하나님, 자신에게 찾아와 약속을 주시고, 자신의 삶을 돌보시며, 자신과 동행하시는 하나님과의 오랜 사귐의 결과로 그가 도달하게 된 자리이지 그의 남다른 신심의 증거가 아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만나 (그에 대한) 신뢰가 쌓이고, 그 신뢰는 (하나님을 향한) 신실함으로 자라간다. 믿음은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게 된다.


2)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의로 여겼다‘.


의란각자에게 각자의 몫을 주는분배의 정의또는법정적 정의가 아니다. 성경 전체에서(체다카, 디카이오쉬네)‘는 여기 창15:6에 처음으로 나타나고, 창세기에는 3번 사용된다(15:6; 18:19; 38:26). 38:26에서 유다는 다말에 대해네가 나보다 의롭다(체다카)’고 말한다. 여기서란 관계 속에서 자신의 몫을 감당하는 것을 말한다. 유다는 첫째 아들 엘의 죽음 이후 다말로 대를 잇게 해야 하는 책임을 저버리고 있었던 데 반해, 다말은 그 역할을 감당한다.


이런 맥락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를 의롭다 여겼다는 말은 아브라함과 하나님 사이에서 아브라함이 자기 몫을 감당했다는 말이다. 아브라함의 몫이란 다름아닌 하나님에 대한신뢰였다. 그런데 이 신뢰는 아브라함 자신이 스스로 자기 안에 만들어 가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그 안에 생겨난 것이었다. 결국 아브라함의란 하나님의 의로우심의 결과이며 열매인 셈이다.


‘하나님의 의각자에게 각자의 몫을 주는, 죄인에겐 심판을 주고 의인에겐 복을 주는, 분배의 정의(iustitia distrivutiva)‘가 아니라, ‘죄인을 구원하고, 불경건한 자를 의롭게 하는, 구원을 베푸는 의(iustitia salutifera)‘로 나타난다. 베풀어지는 구원의 원인은 구원 받는 자에게 있지 않고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에게 있다. 말하자면 원인이 없는 결과를 주는 것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내신 하나님의 의다. 이 하나님의 의는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라함과 하나님 사이의 언약 체결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18). 아브라함에 대한 어떠한 조건의 요구도 없이 약속이 주어지고, 주신 약속을 하나님이 지키실 것이라 선언한다.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면 구원이 발생한다(46:13).


아브라함의 의란 이러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의 결과로 그 안에 발생하게 된 그의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가리킨다. 그러니 이 의는 그의 믿음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선물인 셈이다. 아브라함은 이후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요구에 즉각 순종함으로 그의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나타낸다. 그의 신뢰는 결국 신실함과 충성됨으로 나타날 것이다. 신뢰와 신실함은 서로 구분 될 수는 있어도 분리될 수는 없는 것이다. 신뢰 없는 신실함은 있을 수 없고, 신실함으로 향해 가지 않는 신뢰는 신뢰가 아니다. 그러나 창15장의 믿음에다 창22장의 순종을 집어 넣어 읽는 것은 뿌리와 열매를 바꿔버리는 것이다.


‘여긴다‘는 것은 없는 것을 있다고 우기거나, 있는 것을 없다고 우기는 것이 아니라, 원인이 없는 결과를 주어 누리게 하는 것이다. 범죄한 자를 죄가 없다고 우기는 것이 아니라, 용서 받을 조건과 이유가 없는 자에게 용서를 허락하여 누리게 하는 것이 여긴다는 말이다. 아브라함 자신에게 약속의 내용이 주어질 아무 이유와 조건이 없지만, 그를 복으로 세우려는 소원을 따라 그의 삶에 찾아와 간섭하신 하나님의 신실함이 이유가 되어, 아브라함이 그 결과를 누리게 되는 것이여긴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일어난 일도 그러하다. 죽은 자를 살리며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하나님을 신뢰했던 아브라함의 믿음이나, 우리의 죄를 위하여 그리스도를 내어 주셨고 우리를 의롭다 하기 위하여 그를 살리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우리의 믿음이나 본질상 다른 것이 아니다(4:24,25). 다른 것이 있다면 아직 내가 아브라함이 도달한 신실함과 충성의 자리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일 것이다.